오피니언 시론

사측이 노조 자기혁신 도와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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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노조가 만신창이가 되고 있다. 채용 비리, 공금 유용, 리베이트 등 하루가 멀다 하고 각종 비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상급단체.기업노조.한국노총.민주노총 구분도 없다. 차이가 있다면 검찰 조사가 한국노총은 상급단체에, 민주노총은 대기업 노조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 정도다. 이런 구분은 별 의미가 없다. 노동계도 다음은 어디 차례인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실정이다. 털어서 먼지 안 날 곳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노조운동은 핵심 동력인 도덕성에 치명타를 맞고 총체적인 위기의 늪에 빠져 있다.

문제를 일부 간부의 개인 비리로 좁혀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몇 사람을 처벌하더라도 다음 사람도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개인 착복이 아니라 선거자금이나 조직 운영에 보탰다'는 연루자들의 주장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많은 것을 시사한다. 10여 개의 계파가 존재하는 대기업 노조의 선거에 엄청난 자금이 투입되고 있다는 것과 한국노총의 조합비 등 내부 재원이 조직 운영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은 어제오늘 알려진 일이 아니다. 위기의 축소, 봉합이 아니라 뼈를 깎는 자기 혁신이 필요하다.

해당 노조들도 연루자를 일벌백계하고 외부 회계감사제도 도입 등 자금 운영 투명화를 약속하고 나섰다. 약속은 조속히 실천돼야 한다. 머뭇거릴 경우 정부의 강력한 규제를 요구하는 국민정서가 급속히 형성될 수 있다. 추가적으로 선거공영제도 고려해 볼 수 있지만 핵심은 재정의 완벽한 자립이다. 조합비와 합법적 재원의 범위 안에서 조직을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에서 매년 수십억원을 지원받고 있는 한국노총은 이 젖줄을 끊고도 살 수 있는 혁신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민주노총도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예외는 아니다.

사용자도 관행 혁신을 통해 노조의 혁신을 지원해야 한다. '생산계획의 무조건 달성'이라는 대기업 채용직 경영진의 강박관념에 따라 일부 노조 간부를 임단협 시기에 비공식 채널로 활용하기 위해 각종 청탁을 들어 주는 편의주의적 노무관리는 산업현장의 오랜 관행이다. 채용직 경영진의 강박관념에 따른 편의주의가 비리의 온상이다. 따라서 반듯한 노사관계 정립을 위해서는 일시적인 생산 중지까지 감수하겠다는 대기업 총수의 결단이 역설적이게도 노조의 혁신을 지원하는 핵심적인 방법이다. 투명한 채용시스템 구축은 부차적인 과제다.

이와 함께 경제계는 '상대의 위기는 나의 기회'라는 생각을 고쳐야 한다. 노동계가 위기에 빠지자 즉각 '비정규직 관련 노사정 대화의 중단'을 선언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는 적대적인 노사관계관을 그대로 드러내는 행위다. 이와 관련해 노동계에 전해오는 한 가지 속설을 소개한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위기를 맞을 때마다 사용자나 정부의 '헛발질'로 되살아난다." 자기 혁신이 아니라 외부에 대한 분노로 위기를 극복한다는 것이다. 노동계를 파트너로 인정하겠다면 약할 때 짓밟을 것이 아니라 자기 혁신을 기다려 주는 미덕이 필요하다.

정부도 노동계의 자기 혁신을 도와야 한다. 무엇보다 2004년 체결된 '일자리 만들기 사회협약'의 본격적인 실천이 필요하다. 대기업에 취업하면 중소기업보다 월등한 임금과 근로조건이 보장된다면, 돈을 주고서라도 대기업에 일자리를 구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좋은 일자리 창출과 기업규모.고용형태별 차별 해소가 채용 비리 근절의 토대가 된다. 법과 원칙이 통하는 성숙한 노사관계는 일자리 만들기를 위한 전제조건이라기보다는 그 결과일 것이다.

노조의 자기 혁신, 사용자의 혁신적인 지원과 정부의 혁신 기반 마련이 어우러져 노조운동이 경제와 사회 발전의 중추로 우뚝 서는 날을 기다려 본다.

황기돈 한국노동교육원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