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비 소리] '로또' 하듯 感으로 찍는 해외 번역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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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신간 중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80% 이상이다. 아무래도 국내 필자를 키워 책을 펴내는 단행본 기획의 어려움 때문에 '쉬운 길'을 가는 것이 좋다는 출판사들의 심리 때문이다.

물론 영미권을 포함한 해외 도서가 상대적으로 질과 완성도 면에서 우수하기 때문에 로열티라는 이름의 수업료를 지불하고 저작물을 수입하는 것은 당연한 지적 교류의 방식이기도 하다.

이를 중개하는 창구인 에이전시의 경우 현재 활발한 곳만 30개 회사가 활동 중이다. 이들은 진행료 명목의 수수료와 함께 국내 책 정가의 6~7%를 해외의 원저작권자에게 지불한다.

이 액수와 비율은 심한 경우 3~4%에 머물고 있는 번역 인세에 비춰 상대적으로 높고, 단행본 제작비의 압박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물론 6~7% 로열티 자체는 시빗거리일 수 없다.

거래 금액이 큰 다른 산업의 경우 3~5%의 로열티가 일반적이라고 함에 비춰 두배 이상이 분명하지만, 저작물의 경우 규모가 상대적으로 훨씬 작음을 감안해 볼 때 시비의 대상은 아니다.

문제는 국내 출판사들의 안목과 책 선택의 행태 쪽이다. 책의 주제와 성향, 그리고 자기네 출판사들의 이미지까지 고려한 정교한 번역서 선택이 아니라는 얘기다. 책 제목과 표지, 그리고 해외에서의 명성을 감안한 '느낌 혹은 감(感)에 의한 찍기'로 흐르는 경향이 적지 않다.

좋은 번역서 '찾아내기'가 아니라 '찍기'로 가는 행태 속에서 에디터십은 실종되고, 로또 당첨을 바라는 요행심리가 작용하는 것이다.

한 출판관계자는 "조금 심하게 말하면, 아마존 닷컴에 들어가 한두시간 서핑을 하면서 시장에서 통할 만한, 돈이 될 만한 번역서 원본을 찾아내는 재주를 에디터십으로 아는 편집자가 적지 않다"고 말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책의 물량은 넘치지만, 정작 국내 지식사회의 요구에 걸맞은 정보상품이냐는 별도의 문제로 남는다. 쏟아지는 신간 중 '거품'에 해당하는 책이 절반 훨씬 이상인 것은 그 때문이다.

결과는 묻지마 출판, 밀어내기 출판으로 연결돼 신간으로 선보인 지 두어달만 지나도 서점에서 찾으려 하는 책을 구해볼 수 없는 경우가 속출하는 것이다.

이런 과당경쟁은 1990년대 초반 세계저작권협약에 가입한 뒤 더욱 심해져 온 데다 최근 2~3년새 그림책을 포함한 아동서 붐 속에 10대 출판물에까지 번지는 결과를 낳고 있다.

또 있다. 과당경쟁이 에이전시들의 독과점적 지위를 부추기는 결과를 보이는 것도 피할 수 없는 구조다.

보통 출판사들은 에이전시들이 국내 지식산업 보호와 출판사들의 권익보장 보다는 외국 출판사들의 심기를 다치게 하지 않으려는 고압적 행태를 보인다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그런 행태란 출판사들의 과당경쟁이 자초한 결과인지 모른다.

위안을 받을 것은 없지 않다. '한국생활사 박물관'시리즈 등 시간과 자본을 투자한 기획물이나 동서문명 교류사에 번역서를 골라서 펴내는 사계절출판사, '세밀화로 그린 식물도감'시리즈를 내는 아동물 출판사 보리, '리오리엔트' 등 역사서에 관한 양서를 골라 펴내는 '이산', 저널리즘에 관한한 전문 출판사인 나남출판, 환경서와 이념서에 관한 지치지않은 열정을 보여온 '이후' 등의 존재는 좋은 역할모델로 존재하고 있다.

조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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