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4. 땡볕 <16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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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우리는 아침나절에 주로 반찬 값과 담뱃값 벌이를 했는데 고참이 요령을 알려 주었다. 트럭이 나갈 때에 기름통에 작은 돌을 한 개 던져 소리를 들어보면 만땅인지 아닌지 대번에 알게 된다는 거였다. 만땅 넣고 나가서 비우고 돌아올 때 통행세를 받는 셈이었다. 우리는 그런 푼돈으로 문 밖의 구멍가게에 나가 반찬을 조달했다. 하루는 초저녁에 먼저 잠자고 열두 시쯤에 일어나 교대하고는 새벽 근무를 서는데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 야 황 수병이냐?

목소리가 수문장 하사관이었다. 옛, 일병 아무개 하면서 기합 들게 외치는데 그가 다시 보통 때와는 다른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 새벽 두 시쯤에 2와 2분의 1톤 한 대가 나갈 텐데 차량 번호는 무엇 무엇이다, 번호 확인하면 그대로 통과 시켜라, 잘 알았지?

- 옛, 잘 알았슴다아. 근무 중 이상 무.

나는 눈치로 그게 무슨 꿍꿍이 속인 줄을 알고 있었다. 장교들도 뒤늦게 퇴근 시간이 지나서 나갈 때면 무엇인가 부대에서 물건을 차량에 싣고 나가기 마련이었다. 모두 가난하던 시절에 가족들을 거느린 살림하는 가장들인지라 돼지고기 쇠고기에 쌀이며 기름이며 아니면 담요나 침구류와 피복 따위의 군수품에서 기계류의 부속에서부터 구리 전선에 이르기까지 별의별 군수품들을 싣고 나가는 거였다. 그러나 휘발유나 경유 같은 기름들은 크게 해먹는 건수에 속했다. 새벽에 트럭이라면 그것은 틀림없이 기름이 들어 있는 드럼통일 것이었다. 새벽 두 시는 술꾼들을 비롯해서 밤샘하던 녀석들까지 대충 거의가 곯아떨어질 무렵이다. 부옇게 전조등을 켠 트럭이 다가왔다. 나는 바리케이드 앞으로 나아가 차량의 번호를 확인하고 뒤로 돌아가 포장을 들추고 슬쩍 화물칸 너머를 넘겨다보았다. 역시 드럼통이 몇 개 실려 있었다. 냄새만으로도 배에 쓸 경유라는 걸 알 수 있었다.

- 야 임마 뭘 꾸물거리냐, 연락 받았지?

나는 내키지 않는 동작으로 붉은 신호봉을 휘저어 보였다. 트럭은 조용히 초소 앞을 지나 시내 쪽을 향하여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 뒤에는 아예 인적이 끊기고 새벽까지는 차량의 통행도 없을 것이 분명하니까 의자를 젖히고 바가지도 벗고 군화 발을 책상 위에 올려놓은 채로 한숨 푹 잔다.

신나게 자고 있는데 뭔가 인기척이 들린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다섯 시가 조금 넘었다. 부연 어둠 속에 초소 전방 저만치에 택시 한 대가 섰다. 누군가 택시에서 내려 부지런히 초소 쪽을 향하여 걸어오는 게 전조등의 역광 속으로 보인다. 초소 안으로 들어서는 것은 초소장인 하사관이었다. 나는 잠이 번쩍 깼다.

- 앉어, 앉어. 야 이거 너 해라.

그가 내 앞에 마주 앉으며 주머니에서 꺼낸 양담배 한 갑을 책상 위에 던졌다. 그리고는 영문을 모르는 내게 새 담뱃갑을 뜯어 한 대 내밀고는 라이터로 불까지 붙여주었다. 이럴 경우에 군대에서 하급자는 그야말로 고참을 조심해야 한다.

그림=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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