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광열 선생 영전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종석 유광렬선생의 부음은 우리 구언론인들에게는 큰 충격이다. 우리나라에 민간신문이 나올때의 최초의기자요, 그리고 이제는 더 그러한 선배가 남지않았기 때문이다.
종석은 일찌기 시골에서 서당에 다녔었다. 가세가 빈한하여 나무를 하러 다니던 초동인데 그때 우리나라에 번져가는 일본말을 배우고자 하였으나 그 교재인『속수일어독본』을 살돈이 없었다. 나무 팔아서 산돈으로는 부족하였다. 이때 그 자당이 치마를 팔아서 보태어 그 책을 사주었다. (유광렬 「어머니의회상」)일본말에 능숙해 면사무소에서 일을 거들게 되었을 때 동아일보 참간의 소문을 듣고 상경, 면접을 한끝에 채용되어 사회부에 근무했다.
그 뒤 조선일보 사회부로 욺겼는데 이 무렵에 개벽잡지에 유광열이라는 필명으로 『소의 조선박랑회를보고』라는 글 때문에 그잡지가 압수를 당하였다.
소파 방정환과 숙친한사이라 소파가 함께 어린이운동을 권했지단 종석은『자녀는 어린이를 잘 키워 홀륭한 인물을 만들어주게. 나는 언론으로 항일할텔세』하고 이로부터 평생을 언론계에 바쳤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영어·러시아말을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현대적인 학력은 도무지 없는데 보성비문학교의 입학시험을 보았더니 합격되었다. 학교 당국자의 말로는 『학비를 주선할테니 학교에 다녀보라』 는 것이었으나『나는 내실력이 전문학교 입학자격이 있나 없나를 시험해본 것 뿐입니다. 용서하십시오』하고 학생은 되지않았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해일신보의 편집국장이되었다. 서울에 있는 소련영사관에서 러시아말을 하는 사람을 물색중 종석이 떠올랐다. 종석은 그 요청에 따라 「례닌」 의 『제국주의논』을 영사관 지하에서 1주일을 걸려 우리말로 번역했다.
어찌 알았는지 총독부경무국에서 알고 종석을 불러냈다. 경무국장 앞에 나간 종석은 그 자리에서『해일신보 편집국장을 내어놓아라』는 선고를 받았다. 파면을 당하고 나오니까 형사가 기다리고 있다가 검거하여 유치장으로 끌고갔다. 이에 대하여 종석은 나에게 『나는 자신의 러시아말의 실력을 시험해보았을 따름이다』라고, 말한 적이있다.
나와는 KBS에서 거의 10년동안 『이얘기 저얘기』라는 프로에서 역사와, 세시이야기를 매주1회 내보낸적이 있는데 묻는사람이 나였다. 쿡 쑤시기만하면 막힘없이 술술 이야기보따리가 쏟아져나와 꽤청 취율이 높았다.
한국일보에 연재했던 『근세당쟁야화』 는 이건참의『당의통략』다음으로 불편부당 하게 당쟁을 기술한 것이었는데 아직 한권의 책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의 『기자생활반세기』는 유일한저서인 셈인데, 우리선배의대기자들의 이야기가 실린 것은 이책뿐이다. 종석선생의명복을빈다. <언논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