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핏줄' 은 무엇인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 ‘망가진 꽃들’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미국 감독 짐 자무시. [칸=AP 연합]

이변은 없었다. 지난해 마이클 무어 감독의 반(反) 부시영화 '화씨 9/11'에 황금종려상을 주며 세계 영화계를 놀라게했던 칸영화제는 올해 안정을 선택했다. 장편 경쟁작 21편 가운데 신인 감독의 데뷔작이 미국 배우 토미 리 존스의 '멜키아데스 에스트라다의 세 번의 장례식' 한 편에 그친 데다 황금종려상.심사위원대상.감독상, 이른바 '빅3'도 영화제 동안 호평을 받았던 작품들에 돌아갔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황금종려상과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신생아'와 '망가진 꽃들'이 모두 친자 관계를 다뤘다는 점. 벼랑에 서 있는 현대사회의 가족관계를 해부한 영화들이다.

'신생아'는 젊은 동거 커플이 낳은 아기에 관한 이야기다. 무능하고 돈밖에 모르는 아빠는 어쩌다 생긴 자식에게 별로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 그에게 아이는 키워야 하는 의무로만 느껴지는 귀찮은 존재일 뿐이다. 이때 아기를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되고 아내 몰래 생후 9일밖에 안 된 자기 자식을 팔아넘긴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안 아내가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비로소 자기가 저지른 패륜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한다. 어렵게 아이를 되찾긴 하지만 이제 그의 인생은 회복 불가능한 수렁으로 빠져든다. 아이를 되살 돈을 마련하려고 도둑질을 하고, 결국 감옥에 갇히고 만다. 아내가 감옥에 갇힌 그를 용서하러 찾아오지만 두 사람은 회복의 길이 보이지 않는 엄청난 절망 앞에서 함께 손을 잡고 울부짖을 뿐이다.

'신생아'가 끊어진 부자관계를 그렸다면 '망가진 꽃들'은 끊어진 채 살아왔을지도 모를 부자관계를 다룬다. 혼자 사는 중년 남성이 어느 날 받은 분홍빛 편지 한 통은 자기가 낳았을지도 모를 자식에 대한 출생의 비밀을 담고 있다. 젊었을 때 편지 수신인의 애인이었다고만 밝힌 발송인은 그 남자의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 여행을 떠났다고 알려준다. 이에 중년 남자는 젊었을 때 사귄 여자들의 리스트를 뽑아 그들을 찾아나선다.

20여 년이란 세월을 건너뛰어 옛 애인을 한 명씩 차례로 만나는 과정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삶은 우리 인생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그는 쓸쓸하게, 그리고 힘겹게 사는 그들의 현주소만 확인한 채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에 공항에서 우연히 만난 한 젊은이의 모습은 자신의 핏줄에 팽팽한 긴장감을 전해준다. 며칠 뒤 다시 동네에서 그 청년을 만난 그는 "내가 당신이 찾는 아버지가 아닌가"라고 묻는다. 그러자 청년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도망가고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대답은 침묵으로 채워진다.

칸=박경덕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