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태권도협회 승부조작 사실로 드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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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5월 13일 서울 국기원에서 열린 94회 전국체전 고등부 서울시 태권도 대표 3차 선발전. 전모(17) 군과 최모(18) 군이 3라운드 결승전을 치르고 있었다. 전군이 5대 1로 앞서고 있는 상황. 경기 종료를 50초 남긴 시점에서 심판이 갑자기 전군에게 ‘경고 폭탄’을 날리기 시작했다. 50초 동안 전군이 받은 경고만 7개. 전국 고교 랭킹 3위 안에 들었던 전군은 경고 누적(8개)으로 끝내 반칙패 했다.

경기 직후 전군의 아버지(47)는 심판진에 “편파 판정”이라고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같은 달 28일 아버지 전씨는 충남 예산군의 한 사찰 입구 공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됐다. 최씨가 타고 있던 승합차에는 번개탄을 피운 흔적과 유서가 적힌 A4 용지 3장이 떨어져 있었다. 유서에는 편파 판정을 억울해 하는 최씨의 심정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경고패 당한 우리 아들…. 운동을 그만두고 싶단다. 정말 잠이 안 오고 밥맛이 없다. (…) 결국 내가 지친다.”

전씨가 자살한 뒤 태권도협회 차원에서 진상 조사를 벌였다. 하지만 주심 최모(47)씨의 오심으로 결론 내리고 승부 조작 등에 대해선 문제삼지 않았다. 아들의 억울한 패배를 세상에 알리며 자살한 아버지. 그 아버지의 억울한 사연은 1년 4개월이 흐른 뒤인 최근에야 풀릴 수 있었다.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전씨의 자살 사건을 수사한 결과 서울시태권도협회 전무 김모(45)씨 등의 지시에 따라 심판이 고의로 전군에게 경고를 남발, 승부를 조작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15일 밝혔다. 경찰은 승부조작을 지시한 김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심판위원장 노모(47)씨와 학부모 최모(48)씨 등 6명을 업무방해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승부조작은 ‘서울 D고교 출신’이라는 학맥을 핵심 연결 고리로 이뤄졌다. 경찰에 따르면 지난해 5월 초 서울 D고교 핀급 선수 최모 군의 아버지는 아들을 태권도 특기생으로 대학교에 진학시키기 위해 D고교 후배인 송모(45·D중학교 태권도 감독)씨를 만나 “입상 실적이 필요하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이후 송씨는 역시 D고교 동문인 서울시태권도협회 전무 김씨를 만나 승부조작을 부탁했다. 이에 김씨는 기술심의위원장 김모(62)씨와 심판위원장 노씨, 심판부위원장 최모(49)씨를 통해 주심 최모(47)씨에게 승부조작을 지시했다. 주심 최씨는 시합 당일인 지난해 5월 13일 오전 10시 30분쯤 국기원 현관 앞에서 심판부위원장 최씨로부터 “D고교 핀급”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실제 시합에서 전군에게 경고 8개를 남발해 반칙패를 유도한 것으로 조사됐다. 주심 최씨는 경찰 조사에서 “시합 당시 5번째와 7번째 경고는 주지 않아도 될 상황이었다”고 털어놨다. 경찰 관계자는 “통상 승부조작을 할 때 시합 직전에 윗선에서 학교와 체급만 알려주면 주심이 알아서 해당 학생이 유리한 판정을 받도록 경고 등을 남발해 경기 내용을 일방적으로 몰고간다”고 설명했다.

전군의 시합 상대였던 최군의 아버지도 승부 조작 사실을 시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태권도 국가대표 출신으로 현직 대학 교수인 그는 경찰에 “태권도를 하는 사람이라면 자식과 제자를 위해 여러 방면으로 부탁해야 하는 게 현실”이라며 “지인을 통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게 태권도계의 관례”라고 진술했다.

경찰 관계자는 “승부조작을 주도한 학부모와 감독, 서울시태권도협회 전무 등은 D고교라는 학연으로 평소에도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는 관계였다”며 “현재까지 승부조작 대가로 돈이 오간 정황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추후 보강 수사를 벌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편 경찰은 승부조작 사건과는 별도로 서울시태권도협회의 비리 혐의도 추가로 적발했다. 경찰은 허위로 활동보고서를 작성해 40명에게 활동비를 부당지급한 혐의(업무상배임)로 전 협회장 임모(61)씨 등 11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임씨 등은 2009년 1월부터 지난 2월까지 협회와 관련된 활동을 하지 않은 비상근 임원들에게 허위로 서류를 작성해주고 약 11억원의 활동비를 부당하게 지급한 혐의를 받고 있다.

정강현 기자 fone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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