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의 요체는 부하말 경청하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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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김용완 전경련명애회장은 20일 KBS 재3TV(교육방송)를 통해 자신과 동방이 걸어온 길과 경영철학을 공개했다.김회장(77)은 4,5,9,10,11,12대 전경련회장을 역임했으며 재계에서는 덕있는 인격자로서 존경을 받고있다. 김회장의강연내용을 요약한다.
29년 일본광도고등사범학교 수학과를 졸업하고 학교로 가려던참이었다.
그런데 당시 내 처남이었던 김년수씨(사망)가 경성방직·삼양사·중앙상공등을 경영하고 있었는뎨 나보고 학교에 가지말고 일을 같이 하자고 했다.
그래서 길을 바꿔 기업에 참여하게됐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라 주판놓는것,장부하는 것등을 배우는등 몇 달을· 견습사원노릇을 했다.
견습으로 몇달이 지나자 김년수씨가 허리띠· 대님을 만들던 공장을 인수해 경영하던 중앙상공 이라던 곳으로 가서 일했다.
고무신을 만들고 있었는데 빚이 많고 경쟁도 심하고, 세계적 공황도 겹치고 풍년으로 쌀값도 폭락하는등 아주 여건이 나빴다.
당시 나는 부실기업을 경영할 자신이 없다고 사양했으나 김씨가 『뒤에서 밀어줄테니 시키는대·로만 하라』며 거듭 권고를 해서 일을 맡게 됐다.
부도막는 것이 일이었다.
하루는 고무신업계의 시장조사룰 나갔다.당시 고무신 장사는사회에서 천하게 볼 뿐만아니라 서로 속이는 나쁜 풍토였다.정말 교육계하고는 하늘과 땅차이였다.
그때 나는 기업을 하려면 원리원칙에 따라 모든 것이 정상화 돼야겠다는 생각을 굳였다.
즉 첫째 물건을 잘 만들고.둘째 값싸게 만들고,세째 거짓말하지 말아야겠고,네째 이러한원칙아래 상표를 오래 선전하면신용을 얻을수 있다는 방침을 정했다.
차차 기반을 다지고 별표고무신이면 다 알아주었다. 2년이 채못되어 결손을올 다 매울수 있었다.
새시장을 개척키 위해 황해도를뚫고 들어가는데 일본상품과 경쟁했다. 「6개윌 품질보증」이라는 제도를 썼다.그러나 4∼5개월 신고는 일부러 돌에 문질러 신을 띨어뜨리고 새 것으로바꿔달라는 사람이 있었다.회사가 망한다고 불평들을 했다
그러나 정밀조사를 했더니 1백켤레중 고의로 물건을 망가뜨려 바꾸러 오는 사람들은 2∼
3명에 불과했다.
이런식으로 해서 사업이 차차잘되니 재미도 있고 자신도 생겼다.
그후 김년수씨의 권유로 간척사업과 개간사업을 하다가 38년공개법인인 경방지배인으로 일을하게됐다.
일본회사들이랑 경쟁을 하는대품질이나 가격에서 일본제품울 따라같 수 없다.
애국심에 호소했다. 「우리 옷감,우리 손으로」라는 광고등으로 애국심에 호소하는 대대적 선전을 했다.효과가 좋았다.대졸사원을 뽑는데 자격을 조선사람 으로 한정시켰다.월급이 일본회사보다 적은데도 많은 사람이 응모했다.당시 응모했던 사람중에서 나중 경방사장이 나왔다.
한국자본· 한국기술· 한국인에의한 경영을 한셈이다.20여년동안분투노력해서 착실히 발전한 셈이다.
6·25를 당해 경방계열공장이 모두 폐허가 됐다. 수복이 돼 재건하려고 융자신청을 ,했으나 경방에 돈을 주면 돈이 야당으로흘러들어간다고 돈을 꿔주지 않았다.
당시 재무장관이던 백두진씨를몃달동안 매일 찾아가 절대 정치자금으로 쓰지 않겠다고 약속,얼마간의 돈을 빌어썼다.
그라나 두달도 못가 국세청등7개 기관으로부터 장부와 돈을압수당했다.
문을 닫았다.그러나 직원들 집에 돌아가지 않고 돈을 안받아도 좋으니까 일하겠다고 나섰다.『같이 살고 같이 죽자』 고 결심했다.
그래서 고리사채룔 쓰고 타고다니던 자동차도 팔았다.직원들리 무척 좋아했다.52년2윌이었다.염동설한인데 직원들이 밤에도 촛불을 켜고 일했다.
그러나 원면을 구할 수 없었다. 돈을 빌을 수가 없었다.그래서 「무초」 초대주한미대사를 만나 사정을 얘기했다. 「무초」대사가 『원조물자를 정치에 이용한다』 고 무척 흥분했다. 얼마후 「무초」대사의 도움으로 9개월분의원면을 무이자로 융자받을 수 있었다.어떻게나 좋은지 몰랐다.
물자가 귀해 물건만 만들면 막팔릴때였다. 그러나 4·19까지 차관도 은행융자도 얻을수 없었다.
5·16이 터졌다.
고박정희대롱령이 최고회의부의장시절에 경제인들을 만났다.그때 나는 농촌안정계획과 대학점원의 반정도를 전문대로 전환시 켜줄 것을 건의했으나 둘다 시행을 못하게 됐다.
그직후 나는 재벌도 아니고 재산가도 아닌데 주위의 권고로 전경련회장을 맡게됐다.한 10년간 전경련회장을 했다.
1차,2차 경제개발계획기간중「멕나마라」 새계은행총재를 만난것과 8·3조치가 기억에 남는다.
1차기간동안은 경제는 경제만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공장에서 물건을 잘 만들어도 사주지 앓으면 안되는 것이 당시의 절실했던 생각이었다.
2차기간동안은 8·3조치가 나게된 경위가 새롭다.
당시는 기업들이 사채에 눌려 도산이 계속되고 있었다.고위층에 건의할 결심을 하고 내가 사잠으로 있던 경방의 부동산등을처분,사채을 모두 갚았다.
71년 국회에서 예산편성할 때 내가 폭탄선언을 했다. 『국가예산을 반감해라` 세금이 안걷히는데 어떻게 국가를 운영하려고하느냐』 고 신문들이 대서특필했다.
그직후 무역진흥화대회의애서 박정희대통령이 착석하자마자 나를보고 막 호통을 쳤다. 『국가가망하란 말이냐』 며 흥분속에 꾸지람을 졔속했다.답변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끝나고 가려는뎨 나를 불러서대통령과 대통령비서실장,그리고나 셋이서 자리를 같이했다
박대통령이 『어떻게할작정이냐』고 물었다.그래서『어떻게하기는어떻게합니까? 세금을 낼 도리가 없읍니다.
은행에서 돈을 풀어줘야 합니다.이럴 때 행정력이 필요한 겁니다.경방은 사채가 없읍니다』라고 얘기했다.그랬더니 정색하고 얘기를 듣는 것 같았다.
그후 여러가지 우여곡절를 거쳐 「8· 3조치」 (사채동결)가 나왔다.
올해로 4차5개년계획이 끝난다.2O년전과 비교하면 큰 발전을 한 것만은 사실이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안보,안보하지만 경제안정 없는 안보란없다는 점이다.
기업인의 책임은 크다.좋은물건믈 만들고,이익을 내 세금을납부하고,고용층대를 하고,복지사업도 해야한다.
국력배양의 기초가 되는 셈이다.그러나 욕을 제일 많이 먹는 것도 기업인이다.기업인들이『잘못하는 것이 있으나 대국적 견지에서 하나씩 고쳐가야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세대는▲물가안정▲공해문제▲인간성소외라는 과제를 안고있다.
경방을 그만둔지 6년반이 됐다.4O년간의 기업경영이라는 내경험에 비춰볼때 인간경영에서 중요한 것은 부하직원들의 말을 잘경청하는 것이다. 그일을 가장 잘아는것은 그일을 하는 사람이기때문이다.
또 공을 부하직윈들에게 들려야만 직윈들이 보람을 느끼고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다.공정해야하고 사욕을 부려서도 안된다.
공감대속에 상대방의 입장에서생각하고 일해야한다.자기위주·자기고짐올 세운다고 일이 되는것은 아니다.
가정에서는 내가 고집이 세다.
유고집안에서 자란 탓인지도 모르지만 집에서는 아이들에게 엄한 편이다.자식이 귀하지만 사람을 만들기 위해선 어쩔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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