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수맥 한줄기에도 대자연의 "기"있다|임응승 신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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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인간이 대자연과 하느님에 대한 외경심을 가져온지는 이미 오래 전부터다. 자연을 이용, 정복하기 위한 과학과 하느님을 받들기 위한 종교의 세계가 인류사와 함께 전개돼온 것도 이같은 외경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대자연은 가히 창조주의 교과서라 할만하다. 풀 한 포기, 물 한 방울에도 인간이 배우고 연구할 무궁무진한 가치가 있으며 이를 창조한 전능하신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를 내포하고 있다.
흔히들 지상에 수질오염이나 도시공해 등이 매우 심각하게 보도될 때마다 자연에 대한 외경심을 다시 한번 일깨우곤 한다. 30년 가까이 신부로서 성직에 몸을 담아온 나도 이같은 범주에 속하는 한사람이긴 하지만 다소 남다른 자연의 위력을 직감, 남을 위한 가치 있는 「봉사활동」에까지 연결시킨다.
유머러스하게 표현해 식수, 농·공업용수 등의 지하수 물줄기(수맥)를 용하게 찾아내는 지관(?)신부라는 별칭이 붙어 다닌다.
나는 우연히 중학교시절부터 수맥에 관심을 갖고 나름대로의 공부와 연구를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워왔다.
신자들 앞에서 늘 강조하는 나의 강론(설교)의 핵심은 『자기를 위해 하는 일은 별 가치가 없고 오히려 흉잡힐 경우가 많으나 남을 위한 일은 가치가 있고 보람이 있으며 주님의 거룩한 뜻에 순응하는 것』이다.
나는 이같은 내자신의 절교를 지관이라는 본직이외의 아마추어적인 직무를 통해서 실천에 옮길 때가 많다. 수맥을 찾아주는 일로 해서 국가나 남을 위해 봉사할 기회를 갖게될 때마다 큰 보람을 느낀다.
전후방 군부대의 지하수개발은 물론 공업용수의 수맥을 찾아주기도 했고 많은 공원·박물관 등의 식수용 수맥을 찾아주었다.
특히 하루 수천명씩의 국내외 관광객이 입장하는 경주국립박물관이 지하수개발에 여러번 실패했을 때 75년봄 수맥을 찾아 크게 고민하던 식수를 거뜬히 해결해주었던 일은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내가 수맥을 찾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버스토큰 3개 정도를 끈에 맨 간단한 추하나만 손에 들면 물줄기를 찾아낼 수 있다.
추를 자연스럽게 들고 탐지하고자하는 대상물체를 생각하며 걸어가면 물체(수맥)가 있는 곳에서는 추의 반응이 온다. 다시 깊이를 생각하면 추가 움직이며 회전, 그 회전수로 수맥의 깊이를 알아낸다.
이는 요사이 흔히 이야기하는 일종의 심령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수맥을 찾는 일에서 대자연을 창조하신 조물주의 전능함을 거듭 실감해오고 있다. 홍수·해일 등의 수해가 오면 「수마」의 위력을 무서워하며 떠들썩한 것을 거의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겪는다.
그러나 이같은 큰 재해를 당해서야 자연의 위대함과 무서움을 인식하는 우리의 일상생활 주변을 다시 한번 둘러보면 창조주의 위엄은 쉽게 발견된다.
우리는 장판방이 갈라지는 것, 담벽·축대에 금이 가는 경우를 흔히 본다. 그 원인을 살펴보면 대부분은 상식적으로 판단하는 부실공사가 아니라 그 밑에 수맥이 지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하루에 수백t씩 끌어올려 쓰는 거대한 수량이라는 것도 길고 좁은 틈새를 거쳐 나오는 물이 보충해준다.
그리고 중단 없이 계속되는 수맥은 무엇이나 깨뜨리는 「기」를 발한다. 이 원리는 오랫동안의 수맥발굴 끝에 1977년 내가 나름대로 규명해낸 원리다.
수맥을 통해 발견한 또 하나의 사실은 수맥이 지나간 방을 사용하는 경우 신경통 질환을 앓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특히 고혈압 체질은 중풍에 안걸리는게 이상할 정도이고 저혈압체질은 불면증·신경통 등을 잃게된다. 이같은 질환은 수맥만 피하면 깨끗이 낫는다.
원자로나 정밀한 기계류도 수맥 위에 두면 틀림없이 고장난다.
수맥의 기를 차단할 수 있는 물체는 동판뿐이다. 그리니까 침대 밑이나 방바닥에 동판을 깔면 된다.
나는 이같은 사실에서 창조주와 대자연, 인간의 과학이 교차하는 상호 의존성을 발견했다.
권력과 금력을 내세우는 인간의 교만함은 하느님과 자연의 다스림 앞에서는 오직 무력할 뿐이다. 그러나 부지의 소치로 창조주와 자연에 도전한 죄는 용서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또 어느 정도까지는 동판으로 수맥의 화를 막을 수 있듯 인간의 자연정복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아직도 인간의 힘은 창조주나 대자연에 비해서는 한계를 지닌 제한된 힘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종교를 믿는 것도, 자연을 노래하는 것도 인간능력의 한계를 깨닫자는데 1차적인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철근과 시멘트·벽돌 등을 배합해 가장 튼튼히 짓겠다고 건축한 호화주택도 한줄기 수맥 앞에서 금이 가고 심하면 도괴의 위험에까지 이른다는 사실은 바로 우리 인간이 창조주와 대자연 앞에 겸손해야 할 자세를 가르쳐주는 교훈일 것이다.
개인주의·과학문명시대로 표상 되는 현대인류의 생존방식이 파생시킨 「인간 소외」와 위기도 겸허한 자세로 돌아가 남을 위한 봉사에 아낌이 없을 때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신을 갈구하는 마음으로 거듭 위대한 자연의 섭리를 감사하며 창조주의 큰 뜻을 받들 때 우리 모두의 구원이 이루어지겠다.
창조주와 자연 앞에서의 겸허한 자세는 바로 인류를 살아남게 하는 절박한 기도이기도 하다.

<약력> ▲1923년 황해도 은율 출생 ▲가톨릭 신학대졸업 ▲서울 가회동 성당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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