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 『게르니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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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게르니카는 스페인 북부 피레네산간의 한 소읍이다. 소수민족인 바스크 사람들이 살고 있다. 「스페인 내란」무렵 피의 참극은 이한촌마저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1937년4월26일 느닷없이 들이닥친 나치 독일폭격기는 이 마을에 무차별로 폭탄을 쏟았다.
주민3천6백명 가운데 2천명이 이 때 목숨을 잃었다. 스페인 내란 중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권은 스페인 「인민전선」정부를 전복시키려는 「프랑코」 파시스트세력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해 파리에서 게르니카의 소식을 들은 「피카소」의 충격은 여간 아니었다. 그는 공화파의 「인민전선」정부를 지지하고 있었으며 마침 그해 파리에서 개최될 세계박람회 스페인관에 전시될 작품을 스페인정부(공화파)로부터 부탁 받고 있었다. 그의 조국이 내란에 휘말린 것도 가슴아픈 일인데 무참한 살육을 보는 심정은 아마 불길 같았을 것이다.
「피카소」는 기어이 붓을 들었다. 불과 한달 만에 그의 작품은 완성되었다. 가로7m76㎝, 세로3m49㎝ 초대작.
그는 복받치는 분노의 불길속에 자신의 영감과 창작의욕을 불태워, 불후의 명화 『게르니카』를 남겼다.
울부짖는 야생마, 공포에 사로잡인 황소, 짓밟힌 인간, 등불을 든 처절한 여인, 절규하는 군상. 화면의 빛깔마저 침울하고 단조롭다.
「피카소」는 이 작품에 『게르니카』라는 제목을 붙이면서 『이 그림은 스페인을 고통과 죽음의 바다로 몰아넣은 파시스트에 대한 나의 혐오감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1939년 전 유럽이 전쟁에 휘말리면서 이 그림도 망명의 길을 떠나야했다. 뉴욕 현대미술관에 장기 대여 형식으로 머물게된 것이다.
그 동안 「프랑코」정권은 이 그림을 되돌려 받기 위해 소극적이나마 노력은 했다. 그러나 「피카소」의 심정은 그것이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피카소」의 의중을 잘 아는 그의 개인변호사는 만년에 「피카소」유언을 받아 놓았다. 『나의 그림「게르니카」는 스페인에 국민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회복된 후에만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1973년 이 세기의 화가는 그런 유언을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다. 바로 2년 뒤엔 「프랑코」총통 역시 세상을 떠났다.
「프랑코」없는 스페인엔 1975년 새 정부가 들어섰다. 이제 『게르니카』의 향방을 결정지을 스페인의 정치적 향방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가 남은 문제였다.
뉴욕현대미술관장 (리처드·올런버그)과 「피카소」의 변호사(뒤마)는 「정치평론가」가 되어야 했다.
그들의 결론은 9월10일 『게르니카』의 환국으로 끝났다. 젊은 시절「피카소」가 잠시 관장을 지냈던 프라도미술관에 이 명화는 안주하게 되었다.
이제 『게르니카』는 스페인의 민주주의를 지켜보는 역사의 증인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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