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레이야기 나연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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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우리집 아파트 거실에는 물레가 하나 놓여있다.
작년 이맘 때 제주도에 휴가차 갔다가 사 온 물레다.
제주시내를 걷다가 우연히 골동가게 안에 진열돼있는 물레를 발견했는데 그모습이 흡사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머니 모습만 같아서 반갑게 뛰어 들어갔던 것이다.
오래된 것이지만 비교적 보존이 완전했고 오랜만에 나온 좋은 물건이라 애착이 간다는 가게 주인 말에 행여 안판다 할세라 많이 깎지도 못하고 샀다.
그런데 이 물레가 우리집아파트 거실에 놓여지게 되던 날부터 문제가 생겼다.
어느 위치, 어느 자리에 놓아봐도 연세 많으신 할머니를 추운 거실 밖으로 내들린 듯 한없이 쓸쓸해하고 외로워하며 서러운 자태로 앉는게 아닌가?
그때가 봄이든가 여름이 다가오는 계절이면 덜 했으련만 가을이 오고 겨울이오니 우리는 거실보다 안방생활이 많아지게 되었고 어쩌다 냉기 도는 거실밖에 나와 우두커니 앉아있는 물레를 보면 뭔가 크게 불효하고 큰죄 짓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때마다 나는 사죄하는 마음같이 가까이 다가가 닦아주고 만져보고 돌려보며 위로해 주었는데 어느날부턴가 물레를 돌릴때마다 매일 다른 여인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어느날은 양씨 성을 가진 늙은 할머니의 얼굴이 떠오르는가 하면 어느 때는 부씨 성을 가진 소복 입은 젊은 과수댁의 얼굴로 떠오르고 또 어느 때는 고씨 성의 늙은 해녀의 얼굴로 떠올라 그들이 함께 불렀을지도 모를 노랫소리까지 들려왔다.
한라산 허리에 시러이 익은숭 만숭
서귀포 바다에 해녀가 든숭만숭
둥그대 당실 둥그대 당실…
그리고 내기분이 언짢은 날은 제주도의 그 거센 바람소리와 지아비를 풍랑에 잃은 여인들의 통곡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날은 으레 그 여인들이 끝내 풀지 못하고 간한들이 물레 손잡이를 들리는 내손 끝에 끈적끈적 묻어나 끝없이 나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그들이 항상 인내하고 순종하며, 그리고 미움 없이 서로를 사랑하며 살다 갔기에 오늘의 나를 끝없이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은 아닐까?
이즈음, 도처에는 끔찍하고 살벌한 사건들뿐이다.
사소한 이해 관계로 타인을 욕되게 하고 참지 못하고, 용서는 더욱 없고 증오하고 비난하고 모함하고, 그리고 때로는 죽이고….
이 모든 것을 복잡한 사회구조 탓으로만 돌려야할까?
서로를 용서하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은 어디에 가서 찾아야 할 것인가.
하나님께서도 인간을 완전하게 만들지 못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긍휼히 생각하고 용서하는 것은 혹시 아닐까?
오늘만은 물레를 돌리며 뒤로 밀지 않고 생각해본다. 나는 모든 것을 참고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방송작가>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72년 『사랑의 훈장』 (KBS-TV)으로 데뷔, 『부부』 『야! 곰레야』 『달동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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