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칭은 과학이 아니라 예술이다 (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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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가 방방곡곡에 퍼지다보니 그 곳의 세세한 구질분류도 야구팬들에게 널리 전파되었다.

사실 싱커, 커터, 포크, 너클볼 등 세상에 나와있는 모든 구질들은 대부분 1900년 전후에 거의 완성된 것들이다. 대략 1850년부터 시작한 야구는 변화와 발전을 겪으며 상당히 많은 것들을 만들어냈다. 1930년대 들어서는 현재에 쓰이는 모든 것들이 거의 다 완성되었다고도 한다.

20세기 초의 300승 에이스들은 이미 싱커나 슬라이더, 포크볼 등 현대야구에 와서 만들어졌다고 여기는 대부분의 구질들을 이미 당시에 구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엔 투구분석용 비디오가 없었고, 또 선수가 다른 선수에게 노하우를 전수해 주는 것을 금기시하는 풍토가 있어서 우리들은 당시 선수들이 직구나 커브 등의 단순한 구질로만 야구를 한 것으로 여길 뿐이다.

미국이나 일본, 한국 그리고 세계 여러 나라들도 투수들은 이 그립 저 그립을 다 써보기 마련이다. 물론 일본의 포크볼, 미국의 체인지업, 한국의 슬라이더같이 나라마다 각기 자주 쓰는 구질의 차이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심판의 스트라이크존, 타자들의 성향차이 등의 복합적인 작용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한국 투수가 싱커를 던지지 않고 미국투수가 포크볼을 뿌리지 않으며 일본선수들이 체인지업을 구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구질은 불연속적으로 딱딱 끊어진 개념이 절대 아니다. 그렇지만 야구를 직접 해 볼 기회를 별로 갖지못한 채 인터넷과 TV방송으로 야구 시청을 주로 하는 팬들은,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는 야구란 경기를 컴퓨터게임처럼 도식화하는 과정에서 구질 역시 도식화화는 경우가 많은 게 사실이다.

슈트는 일본에서 부르는 역회전공의 다른 이름이다. 국내에서는 그냥 역회전공이라 부르기 때문에, 이 슈트를 일본에서만 쓰는 구질이라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작년도 세인트루이스 트리플 A에서 주로 활동한 오릭스 출신의 일본인타자 다구치 소는 최근 ''작년엔 미국 투수들의 몸쪽으로 뿌리는 슈트 때문에 애를 먹었고, 그런 공은 일본에서 본 적이 없다''는 흥미로운 발언을 남겼다.

슈트가 판을 치는 일본리그에서 온 선수가 그런 말을 내뱉은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 투수들이 슈트를 구사할 때의 구속은 포심을 던질 때보다 약간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반면, 미국에선 'Fastball'을 직구라는 개념보다는 속구라는 의미로 쓴다. 동양권에서 직구는 빠르게, 반듯이 가는 공이지만 미국에서 속구는 절대 반듯하게 날아가지 않는다. 메이저리그 투수들은 장타허용을 피하기 위한 일환으로 대부분 긴 손가락으로 싱킹패스트볼을 던지며, 그것을 직구라 이야기한다.

다구치로선 미국 투수들이 시종일관 빠른 슈트를 몸쪽에 붙여오는 것으로 느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메이저리그 투수들이 종종 던지는 커터 역시 일본이나 국내에서 전혀 쓰지 않는 공이 아니라 ''고속 슬라이더''라는 단어로 바꾸어 부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개념이 다른 것처럼 여기고있을 때도 있다.

라이징패스트볼은 떠오르는 직구다. 정확히 말하면 떠오르는 게 아니라, 중력의 영향을 순간적으로 덜 받는 눈의 착시현상에 불과하다는 과학적인 분석이 나와있다. 그러나 정작 공을 상대하는 타자와 포수, 주심들은 공이 분명히 떠오른다고 느낀다.

일본야구에선 간간이 '자이로볼'이란 단어가 나오기도 한다. 일본에서도 공식적으로는 쓰이지 않는 용어인데 요미우리의 우에하라가 던진다 알려졌으며,역시 중력의 영향을 덜 받아 볼 끝이 죽지 않고 타자의 예측보다 약간 떠오르는 공이다. 사실상 라이징패스트볼이라 할 수 있는데 명칭만 다른 것이다.

투수가 어떤 공을 던지면 투수는 커브를 던졌다고 하고 받은 포수는 슬라이더가 좋았다고 하며, 친 타자는 포크볼에 속았다고 할 수도 있다. 실례로 선동열 투수가 91 한일 수퍼게임에서 강타자 오치아이 히로미츠 (당시 주니치)를 슬라이더로 삼진 처리하자 오치아이 선수가 "선상 싱커가 매우 좋다"고 평하기도 했다.

어떤 선수가 던지는 커브를 똑같은 방식으로 던지는 다른 선수는 자신의 구질이 슬라이더라고 얘기하기도 한다.90년대 초 삼성 라이온즈에 있었던 마티 투수코치가 선동열의 슬라이더를 파워커브라 평한 것이 좋은 예다.

또한 A가 던지는 포크볼이 B가 던지는 싱커보다 더 둔한 변화를 보일 수도 있고, C의 커터가 D의 슬라이더보다 더 휘어나갈 수도 있다. 굳이 자신은 커터라고 알고 배워서 커터라고 얘기하지만, 실제로 응용하여 사용하는 과정에서 슬라이더처럼 던지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 선수들이 처음에 코치에게 구질을 배울 때 그 구질 명으로 자신의 구질을 결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 거기에 많은 응용을 가하다보면 분류하기 어려운, 또 사실상 그럴 필요도 거의 없는 자신만의 구질이 나오게 된다.해태에 막 입단했던 선동열에게 슬라이더 던지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해태 방수원 투수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동열아, 네 슬라이더 던지는 법 좀 가르쳐주라"고 부탁했다는 일화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사이영 상을 3번 수상하며 70년대 뉴욕 메츠의 에이스로 활약했던 톰 시버의 경우 싱커를 3가지 그립으로 해 던졌다고 하는데, 그 중 하나는 슬라이더 그립, 다른 하나는 포심의 그립이다. 자신이 그것을 싱커라고 해서 그렇지, 만일 처음부터 슬라이더를 특이하게 던진다고 말했다면 '시버 슬라이더'같은 이름이 붙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구질을 세세하게 구분하는 것은 팬들에게는 아주 재미있는 일이지만, 정작 현장의 선수들에게는 날아오는 공이 투심인지 포심이던지 커브인지는 거의 무의미하다.순간적인 타이밍에 승부해야 하는 그들로선 모든 구질이 사실 직구 아니면 변화구이기 때문이다.

문현부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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