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4화 한미 외교 요람기>(25)안보리, 참전 결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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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순서가 다소 뒤바뀌는 것을 알고 있으나·독자들의 요구에 따라, 50년 6월 25일 유엔안보리가「전쟁행위의 중지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한 직후의 상황을 간단히 다시 얘기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미국이 주도한 대로 6월 25일 유엔안보리가 북한측에 대해 전쟁행위를 즉각 중지하라고 요구했는데도 남침속도는 더 빨라졌다.
오히려 한국정부는 27일 새벽 1시 중앙청에서 비상 국무회의를 열어 유도를 결정하고 이대통령이 피난길에 올라야 하는 급박한 상황으로 악화됐다.
사태가 심각해지자「트루먼」대통령은 27일「존슨」국방장관으로 하여금 미 해·공군의 한국지원을「맥아더」유엔군 사령관에게 훈령토록 지시했다.
동경의「맥아더」장군에게 전달된 훈령은『남한으로부터 북한의 군사력을 일소하기 위해 38선 이남의 모든 군사목표물을 미 공군이 공격하도록 명령할 것이며 또 미 해군으로 하여금 38선 이남에서 남한에 대한 침략군을 막기 위해 남한 연해에서 아무런 제한 없이 작전을 수행할 권한을 부여해도 좋다』고 돼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훈령은 어디까지나 미군지원을 해·공군에 국한하고 군사행동은 38선 이남으로 제한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6월25일의 안보리 결의안이 북한 침략에 대한 군사적 제재를 언급하지 않았던 것을 참작할 때 이 군사적 조치는 일대 결단이었다.
유엔안보리의 2차 회의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열렸다. 27일 하오 3시(미국시간) .
인도 대표「라우」의 사회로 열린 이날 회의에 미국은「대한민국에 한 군사원조에 관한 결의안」을 제안했다.
『북한당국이 전투행위를 중지하지도 않았고 그 군대를 38선까지 절수하지 않았다는 것과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시키는데 긴급한 군사적 조치가 요청된다는 유엔 한국위원단의 보고서를 주목하고 유엔회원국들이 대한민국에 대하여 이 지역에서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지원을 제공할 것을 권고한다.』
이 같은 결의안을 제안한 미국의「오스틴」대사가 일어나 발언했다.『북한은 지난 제1차 안보리 결의를 거부하고 오히려 공격을 계속하고 있다. 이는 북한 당국이 안보리 결정을 조롱하고 있다는 사실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북한 공산군의 한국공격은 바로 유엔 자체에 대한 공격이다.』초강경 발언이었다.
「오스틴」은 회의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이날 낮 미 해·공군으로 하여금 한국군에 지원을 제공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힌「트루먼」의 성명서를 낭독했다.
이어 장면 대사가 연단에 나셨다.『본인은 한국정부를 대표하여 효과적인 대책이 즉각 취해지기를 이 자리를 통해 모든 유엔회원국에 간절히 호소하는 바이다]
회의장에는 소련대표「말리크」가 25일처럼 역시 나타나지 않았다. 1차 회의 때도 그랬지만 이날 안보리에 앞서 우리 대표단은 혹시「말리크」가 참석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로비에서 또는 점심식사 자리에서 우리들은 미국대표를 비롯해 우방대표들을 잡고「말리크」참석여부에 관한 정보를 알아봤다. 아무도 알지 못했다.
1,2차 안보리를 앞두고「그로스」주 유엔 미국 차셔 대표는「트리그브·리」유엔 사무총장·「에이브러햄·펠러」유엔고문과 함께 절차문제를 협의하면서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해 안보리의 기능을 마비시킬 경우의 대책을 협의한 일이 있었다. 소련 거부권에 대응하는 문제는 미국무성의 유엔관계국 직원들이 맡는 것으로 돼있었다.
미국의 대응책에 대해 알아보려는 나에게 미국무성의「나일즈·본드」는『일단 북괴의 전투행위를 중지시키고 필요하면 38선도 넘어가는 방향』이라고만 귀띔했다. 그러나 이 얘기는 채 시간이 없어서 정부에 보고도 못했다. 만약 소련이 참석해 거부권을 행사했을 경우 미국이 어떻게 행동할 것이냐는 문제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지만 미국은 유엔회원국의 자격으로 단독적인 군사행동을 취했을 것으로 본다.
미국이 내놓은 결의안에 대해 인도를 대표한「라우」의장과 이집트 대사는 본국 훈령을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1시간씩 두 차례나 정회를 요구하고 나중엔 회의를 다음날로 연기시키려고까지 나왔다.
장 대사와 나는 소련의 참석을 우려해 여간 초조하지 않았다. 다행히「오스틴」미 대사가 지체할 수 없다고 서둘고 중국·영국 등이 가세해 밤 10시45분 회의가 속개됐다. 찬성 7, 반대 1, 기권 2로 결의안이 통과됐다.
장 대사와 나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숙소로 달려갔다. 대전의 이 대통령에게 낭보를 건하기 위해서였다. 황규면 비서가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서울이 방금 공산군의 수중에 완전히 들어갔다』는 황비서의 말을 듣고 비통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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