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의 깊은 잠 언제 깨려나|출판계의 올 상반기…어떤 책이 읽히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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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79년부터 시작된 출판계의 불황은 올해 상반기에 들어 완전히 깊은 수렁에 빠져들었다. 불황의 여파는 뚜렷한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내지 못했고 독자들이 어떤 책을 사느냐는 성향도 분명히 밝혀지지 않게 하고 있다.
이같은 상황 속에 서점가에서 올 들어 그런 대로 팔리는 책으로 꼽은 것은 ▲미국·일본의 소설류 ▲수상집 ▲미래학의 몇몇 저서 ▲한국학 관계 서적 등이다.
출판 전문가들은 책이 근본적으로 잘 팔리지 않는 불황의 상황에서 독자의 성향도 불확실하다고 전제하면서 굳이 말한다면 ▲자기 주변에 대한 관심을 만족시켜 주고 ▲부담 없이 흥미 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을 독자가 원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올 들어 상반기에 가장 많이 팔린 책은 미국의 소설류였다. 『천사의 분노』 (시드니·셀던) 『보통 사람들』 (주리스·케스트) 『끝없는 사랑』 (스코트·스펜서) 등의 책 등이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 일본을 거쳐 우리 나라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는 전래를 그대로 답습했다.
중류 가정의 평범한 생활 속에 일어나는 일들을 쓴 이 소설들은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독자층에 파고드는 요인이 됐다. 출판사들은 경쟁적으로 이들 책을 번역해 같은 책이 여러 출판사에서 나오기도 했다.
승려 이향봉씨의 『무엇이 이 외로움을 이기게 하는가』가 장기적으로 많이 팔린 것도 쉽게 읽을 수 있으면서 독자들이 느끼는 현실의 삭막감을 위로해준 것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국내 소설류로는 이동철의 『꼬방 동네 사람들』, 김주영의 『객주』 등이 꾸준히 나갔다. 이들 소설의 공통점은 현장감에 있다. 독자들이 상상력에 의존하는 소설보다 실화 내지는 시대 상황을 피부에 느낄 수 있는 소설을 택하고 있다는 시사를 준다고 하겠다. 『우리에게 미래가 있는가』 『제3의 파도』 등 인간 위기에 대해 언급한 책들이 팔린 것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함께 하는 현대인의 의식에 어필한 것이다.
『코스모스』 등 자연계의 비밀을 파헤쳐 독자들의 이해를 돕게 한 자연과학서도 예상외의 호응을 얻었다.
한국학 관계 서적은 독자의 범위를 넓혀 가는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의 것에 대한 관심을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일어왔고 최근 들어 그 폭이 확대된 것 같다.
『한국인의 굿과 놀이』 (이상일). 『한국의 판소리』 (정병욱), 『한국 무속 연구』 (김태곤) 등이 독자의 눈을 끌고 있다.
한국학 분야에서 특히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는 것은 역사 부문이고 특히 근대사 부문에 관심이 많이 주어지고 있다.
『한국 근대 민족 운동사』 (안병직), 『한국 근대사와 민중 의식』(이현희), 『한국 근대 역사학의 이해』 (이만렬) 등의 책들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책들은 민중 의식과도 결부되고 있어 민중의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사회 과학 서적으로 『한국의 농업 문제』 (김문식), 『한국 농촌 사회 연구』 (이만갑) 등 농촌 문제와 『한국 경제의 전개 과정』 (김윤환씨) 등 경제 관계 서적이 주목받은 것도 우리의 현실을 알자는 노력이 있다는 증거다.
평론가 이광훈씨는 『출판계의 불황은 경제적인 요인에 의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독자가 원하는 책이 무엇인가를 출판사들이 알아내 공급해 주는 자세가 필요하다』면서 『독자들에게 실생활에 도움이 되고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닌 주변의 일을 잘 알 수 있게 하는 책이 어필할 수 있다는 증거가 요즘 들어 두드러지고 있다』고 말했다. <임재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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