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딸의 균형은 자연의 섭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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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일전에 본 「아들 낳는 비결?」이란 TV프로는 여러 가지로 경악을 금할 수 없는 프로였다. 아이들이 둘 이상은 있음직한 평범한 주부들이 널리 공개된 자리에서 어찌나 스스럼없이 당당하게 자기의 생각이나 경험 심지어는 침실에서의 부부간의 체험까지를 적나라하게 털어놓는지, 수치심을 완전히 탈피한 그 개방되고 발랄한 여성상은 놀라움을 지나 보는 사람을 자주 조마조마하게 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의 발언으로 드러난 그들의 의식이었다. 철저한 아들 선호사상과 미신 속설, 심지어는 방술이라 부를 수 있는 것까지를 포함한 온갖 허황한 비결에 대한 맹종과 호기심은 여성이 자신의 운명이나 갈등을 타개하는 방법이 그런 미신이나 방술 정도가 고작이었던 이조여인의 의식에서 한치도 더 개발 안된 상태임을 입증했다. 그렇다고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이런 보기 흉한 불균형이 여성들에게만 국한된 것이었을까?
정작 경악하고 개탄해야할 것은 우리가 누리고있는 컬러TV라는 첨단의 문화현상이 지니고 있는 낙후하고 빈곤한 의식이다. 그 불균형상태는 때로는 괴물스럽기까지하다.
공익의 입장에 서야한다는 공기로서의 TV가 아들 낳는 비결을 주제로 한 프로를 마련했다는 것부터가 우선 온당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아들을 낳는 일에 성공한 여자나 그 수단방법이 궁금해서 조바심 난, 아직 아들 못 낳은 여자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이야기를 시켜서 도대체 어쩌겠다는 걸까?
같은 말이라도 활자화되거나 단파를 타면 권위가 붙어 저절로 신빙성도 생기고 일반대중에게 끼치는 영향력도 막대해지게 마련이다. 그 영향이 이익이 되느냐 해독이 되느냐를 미리 생각하고 거르는 게 공익을 한시도 저버려선 안 되는 공기의 의무다.
남의 집 인줄에 달린 고추를 훔쳐먹고 아들을 낳았다고 믿은 여자가 있을 수 있는 것처럼 개똥을 주워먹고 암을 고쳤다고 믿는 사람도 없으란 법은 없다.
그러나 그런 비결이란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소문은 될 수 있을지언정 공기를 통한 단파를 타서는 안 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우리처럼 예부터 아들 선호경향이 심한 사회에서 딸만 둔 어머니가 받는 압박과 갈등이 심각한 걸 모르지는 않는다. 아들·딸 가리지 말고 둘만 낳기 중에서 둘이란 수효는 제대로 잘 먹혀 들고있는 반면 아들 딸을 가리는 건 도리어 둘이란 숫자 때문에 더욱 심각해지는 것 같다. 그런 여성들의 고민을 외면할 수 없었다 치더라도 그 문제를 그런 방법으로 제시했어야했을까? 마땅히 남녀의 평등을 지향하는 방법으로 여성들을 일방적으로 괴롭히는 그런 부당한 압박과 갈등의 해소를 도와줘야 옳았을 것이다. 허황한 비결과 고민의 과장은 아들 없이도 행복하게 사는 가정에서까지 새로운 갈등을 심어줄 만한 것이었다.
다행히 자연의 오묘한 섭리는 아들과 딸의 수적인 균형과 조화를 한번도 깨뜨려 본적이 없다.
그래서 오히려 그 조화가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를 모른다.
만일 인간의 지혜가 미신이 아닌 과학으로 그 문제를 풀어 임의로 적용할 수 있다고 치자. 우리처럼 남아선호가 광적인 나라에선 담박 남녀의 균형이 깨지고 남성의 수효가 여성의 몇 배씩으로 늘어날 수도 있으리라.
그때 우린 여지껏 쌍아 온 예절이고 도덕이고 질서고 다 내팽개치고 급한 김에 개미나 벌의 사회질서를 도입해야 될지도 모른다. 일단 그렇게되면 제아무리 존엄한 남성도 일벌이나 일개미 팔자에서 인권을 찾기까지 천년은 걸릴지도 모른다. 인간이 근엄한 까닭은 한남자의 하나밖에 없는 여자, 한 여자의 하나 밖의 남자인데도 있지 않을까.
◇필자약력 ▲31년 경기도 개풍군 출생 ▲50년 숙명여고 졸업▲70년 장편소설 『나목』이 여성동아 장편소설 현상모집에 당선, 문단에 등장 ▲그후 『어떤 나들이』 『도시의 흉년』 『휘청거리는 오후』 등의 문제작을 발표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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