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4)증권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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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신진자동차판부」를 통해 재기하려던 계획도 의도대로 되지않았다.여러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여기선 생략한다.개인적으로는 이를 끝으로 증권계를 떠나는 계기가 됐다.
지나친 의욕이 앞선 나머지 추진하는 과정에서 누를 끼치게 된 여러분들에겐 깊이 사죄하는 마음이다.
이제 증권계와는 동떨어진 최근의 생활담을 끝으로 나의『증권시장』을 끝맺으려 한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그동안 나의 자녀들(2남2녀)은 뜻한대로일이 이루어졌다.모두가 저 높은 곳에 계신 분의 은총이 아닐 수 없었다.
증권게를 떠난 뒤 나는 성경을 읽고 교희에 나가는 생활을 계속했다.
78년3월에는 전범일증권사장 이태진씨등 몇몇 친구와 함께 서대문방주교희 2층에 인애의숙을 설립했다.
불우한 청소년들,특히 수감되어있는 길잃은 걺은 양들을 돌보기위해 만든 것이다.
인애의숙이란 간판을 내걸었을 때주위에선 반대했다.
재사도 조성안한 상태에서 맨손으로 어떻게 사회사업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많은 돈이 있으면야 누군들 못하겠느냐는 생각으로 나는 우선 출판부를 만들고 중학강의록을 인쇄했다.
6월에는 영동포교도소에서 3백60명(중학과정 3백명, 고등과정 60명)의 임교식을 가졌다.
강의록 6천부를 가지고 공부틀시작했다.
한도희소장과 홍영달교무과장등이뜻을 이해하고 많은 협조를 해주었다.
내가 영등포교도소 병사에 있을때 자주 접촉한 오세길교도관도 그후 군산교도소로 전근한뒤 나의 고교소식을 듣고 군산에서 60명을 가르쳤다.
나는 강의록을 보내주고 그 뜻을격려해 주었다.
오씨는 봉급의 절반을 죄수학생들의 학용품 대금으로 써가며 열심히 가르쳤다.
덕택에 국민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못한 전료11범의 학생이 검정시험에 합격하는등 11명이나 중학교 졸업자격을 취득했다.
당시의 김치렬법무부장관으로부터 표창장과 격려금을 받게됐다고 알려왔다.
영등포교도소에서도 수서합격자가많이 나왔다.
나는『독학우』이란 책도 발간해 법무부를 릉해 전국 각교도소로 보냈다.
『그 많은 날이 지나고』란 젊은 무기수의 신앙고백서도 출판해서 전국 교도소에 보내고 있다.
출감하는 젊은이들을 데려다 직장을 구해주는 일에도 힘을 썼다.
전에 나와 함께 활동하던 사장들이 경영하는 공장에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뒤를 돌보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현재 10억윈의 재단기금을마련하려고 노력중이다.
숙합를 건설하여 교도소에서 겁정시험에 합격한 아이들을 데려다공부도 더 시키면서 인간으로 거듭나게 하고자 함이다.
또 일자리를 잡아주는 것만으로는이들의 앞길이 염려됐기 때문이다.
나는 인애의지사무실을 명동으로 옮겼다.
명동의 증권가를 다시 걸어 봤다.거래소가 들어있던 옛 건물을돌아보기도 했다.감회가 깊었다.
지난해 1월에는 옛친구들과 함께모회사의 주식 일부를 인수 했다.
또 지난 1월에는 다른 옛동지들과 인애산업(주)을 설립하여 관광개발사업에 손을대고 있기도하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이 아닌가 한다.
신진자동차판가주식회두 사건 이후지금까지 나는 증권시장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해왔다.
명동으로 사무실을 옮긴 인애의숙의 사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계획이다.
층분한 자료도 없이 기억을 더듬어 그동안 내가 겪어온「증권시장」주변얘기를 대충 적어봤다.
되도록이면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를 적어보려 했다.
하나의 자료로서 후일 도움이 될까 해서다.
그러다보니 그동안의 기술과정에서 언급된 분들에게 행여 폐믈 끼친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널리용서를 빈다.
끝으로 이러한 기회를 마련해주신 신문사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끝>
내일부터 한표욱씨가『한미외교요람기』를 집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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