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2)|제73화 증권시장(70)|「동명 증권」인수|윤응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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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한일은행 융자 건이 실패로 돌아간 뒤 나는 영화·범일 증권의, 채권자들 때문에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어려운 상황이 계속됐다.
교회도 못나가고 답답한 마음을 술로 달래는 타락한 (?) 생활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영화·범일 증권의 채권자들에게 빚을 갚아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내가 뿌린 씨앗은 내가 거둬들여야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무에서 유를 참조하는 격으로 쉽게 될 리가 없었다.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일부 채권자들은 명동의 폭력배들에게 빚을 받도록 하여 회현동 집엔 협박 전화가 끊이지 않았고 칼을 품고 담을 뛰어넘는 자들도 있었다.
고난과 시련의 나날이었다. 그러나 주위에선 내가 그토록 돈이 없을까 하고 믿으려 둘지 않았다.
하루는 집사람이 동생 김영희 (고 박정희 대통령의 안과 주치의인 이필웅 박사 부인)와 함께 육영수 여사를 만나니 육 여사도 윤씨 부인이면 돈이 많아서 좋겠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어렵다는 말은 감히 꺼내지도 못하고 좋은 말씀만 듣고 왔다고 전했다.
공화당 간부들조차 한 백억원은 미국으로 유출시킨 것으로 추측할 정도였다.
한일·통일을 위시하여 영화·범일·홍익 등의 증권 회사 운영을 통해 약 30억원의 빚을 지며 국가를 위해 헌신한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황해도 고향 친구인 이응관씨가 찾아왔다. 증권 회사를 다시 경영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
나는 거래소 전무이사인 이현상씨에게 연락하여 부탁했다.
며칠 후 이씨는 동아건설의 최준문씨가 경영하는 동명증권을 소개했다.
최씨는 메트로 호텔 옆에 있는 사무실까지 인수하라는 것이었으나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 증권회사만 1백만원의 권리금에 인수했다.
대표이사 사장 이응관씨는 회사 운영자금이 없었다.
김성곤씨를 찾아가 5천만원의 증자를 요청하니 김씨는 신동아 그룹 최성모씨와 협의한 후 2천5백만원씩 불입할 것을 약속했다. 최씨의 신동아 보험회사와 김씨 계열의 화재보험회사에서 반반씩 출자하겠다는 것이었다.
며칠 후 김씨를 만났으나 김씨의 마음은 변해 있었다. 내가 증자계획을 비밀로 하지 않아 전일 고흥문씨가 김씨보고 『윤응상씨의 동명증권에 투자한다면서요』하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김씨는 나더러 증권회사는 그만두고 다른 사업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결국 동명증권의 증자 건은 거절당한 셈이었다.
섭섭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5월 파동 전 부정 축재자로 몰렸을 때 내가 도와준 중앙산업의 조성철씨나 김진만씨 등은 돈을 들려주었으나 김성곤씨는 그렇지가 않았다.
계약이 무효인 것 같다는 당시의 실력자 K씨의 말에 따라 금성 방적의 공동 투자 계약금조의 5억원은 공중에 뜨고 말았다.
나는 돈 잃고 사람마저 잃는 것이 싫어서 양심만 생각했던 것인데 일이 사람 뜻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또 한번 느꼈다.
서울 명륜동 최성모씨 집으로 찾아가니 최씨는 선뜻 5백만원을 내주고 제일은행 영업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상덕산업에도 자신의 보증 아래 5백만원을 융자해 줄 것을 부탁했다.
또 2천5백만원의 동명증권 증자 건도 쾌히 승낙했다.
최씨는 내가 한일증권을 인수했을 때인데, 곤란하다고 해서 당시 2백만원 어치의 국채를 그냥 빌려드렸을 뿐이었다.
참으로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김성곤씨의 증자가 예상대로 잘 안된데다 방계회사인 상덕산업의 부도로 말미암아 인수 후 반년도 안되어 동명은 문을 닫았다.
동명이 실패한 데에는 아내의 도움을 받지 못한 것도 한 요인이다.
강성진·이창규·정지원씨 등으로부터 쓴잔을 든 뒤 안식구는 증권계와 인연을 끊으라고 했다.
남대문시장에서 귀금속상이나 하면서 예수님의 믿음 속에 살아가자고 했다.
그러니 동명증권 인수에 필요한 1천만원을 마련해 달라는 말이 들릴 리가 없었다.
여자의 소박한 행복과 남자의 야망을 조화시키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다.
아내는 뒤늦게 나마 내가 기독교에 입문하여 2∼3년간 신부님 집을 찾아다니며 성경 공부할 때가 가장 행복했었다고 후일 털어놓았다.
몇 차례나 다시 시작하여 그 동안의 부채를 갚으려 했으나 번번이 좌절되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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