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8)제73화 증권시장|<제자=필자>강성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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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증권거래소 임원들이 서재식 이사장 집에 모여 긴급회의를 가졌으나 신통한 결론을 얻지 못했다.
거래를 중지시킬 경우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생길 것이므로 그대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다음날부터 보도측의 맹공이 시작되었다. 보도측의 주력은 현 해동화재의 사주인 김모씨였다.
매수측은 울며 겨자먹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매수측의 부담은 점점 더 무거워져 갔다. 이때의 다급한 사정은 다음 이야기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매수측 회사인 윤씨 계열의 일흥증권에 시장대리인으로 강보국이란 사람이 있었다.
강 대리인은 시장에서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매도건옥을 숨쉴틈도 없이 받고 또 받았다.
그러다 보니 몸도 지치고 정신도 혼미해져서 끝내는 시장바닥에 졸도해 버렸다.
의사를 부르랴, 병원에 싣고 가랴, 그렇지 않아도 열기에 휩싸인 시장은 광란의 혼란 속으르 빠져들었다.
이날 시장대리인 한사람을 쓰러뜨릴 정도까지 매매량이 늘어났다는 것은 결국 수도결제가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예상하는 것이기도 했다.
5월말의 수도대금은 모두 3백41억이란 엄청난 것이었다.
이중 90%를 통일증권·일흥증권 및 동명증권 3사가 차지했으니 수도에 대한 위험성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동명증권도 당시의 매수측 주력 3사에 끼어 있었으나 다른 2사와는 달랐다.
사실상 동명은 백체책동은 없었다. 다만 매수측의 매수 주문을 가장 많이 취급해 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매수측의 주동세력으로 간주되었던 것 같다.
5월 파동을 기록한 문헌에도 3사가 책동을 위하여 연합전선을 펼친 것처럼 되어있는 것 같아서 이 기회에 이 점을 분명히 해두고자 한다.
5월의 수도결제 대금은 전기와 같이 3백41억원에 달했고 6월에 결제해야 할 약정대금은 39억원(6월10일 화폐개혁으로 이하「원」으로 표시한다)이나 되어 상황은 파국적 국면으로 치닫고 있었다.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자 금통위는 28억원에 달하는 거액의 수습자금을 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결제자금의 부족분을 메울 수는 없었다.
결국은 기상천외의 결제방법이 사용됐다.
즉 매수측은 매수대금의 일부는 현금으로 결제하고 부족분은 현금 대신 매입한 주식을 보도측에 되넘겨주기로 한 것이다.
5월 파동의 수도결제는 6월4일에 가서야 이러한 군색한 방법을 써가면서 끝낼 수 있었다.
당시 증권업계는 5월말 결제를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습책 마련에 부심했다.
특히 한국증권시장의 창설공로자로 증권사에 영원히 기록될 송대순씨(당시 대한증권업협회장·대한증권사장·대한상의회장)의 중재조정역할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컸다.
증권거래소 시장에서 야간회의를 개최할 정도로 긴박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노구를 이끌고 매일 마라톤 회의를 거듭했다. 이해관계가 너무 얽혀 있었다. 사건의 성질 또한 너무나 중요한 것이어서 웬만한 조경역할로는 오히려 문제를 복잡하게 할 가능성이 많았다.
송 회장은 매수측과 보도측 쌍방으로부터 상대방 편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5월말 수도결제는 송 회장의 사를 버린 희생정신에서 매매쌍방은 합의점을 찾을 수 있었고 수습책이 마련되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처럼 5월의 수도결제는 많은 사람의 피땀어린 노력으로 매듭지어 졌으나 6월 건옥은 부득이 해옥으로 수습할 수밖에 없었다.
파동의 여파가 가시기 전에 6월10일 건국이래 세 번째의 통화개혁이 단행됐다.
증시는 6월11일부터 휴장상태로 들어갔다.
31일간의 휴장 끝에 7월13일 증시는 다시 문을 열었다.
5월 파동 후 6월부터 8월 사이에 24개의 증권회사가 신규로 영업인가를 받았다.
이때 윤씨계 회사로서 영화증권·홍익증권·범일증권 등이 7월에 새로 생겼다. 이 당시 증권회사 수는 무려 60여개에 달해 최고기록을 세우고 있었다.
이때 재무부에 증권과가 신설(62년6월8일)되어 주윤호씨가 초대과장이 됐다.
이무렵 필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화증권의 사장으로 발탁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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