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적 쿠데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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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태국의 현대사는 쿠데타의 만화경을 들여다 보는것 같다. 지난 50년동안 순수민간정부의 집정기는 불과 5년이었다.
전제군주국을 지금의 입헌군주국으로 바꾼 31년의「입헌혁명」은 「피분·송그람」원수의 쿠데타였다. 「피분」은 14년을 통치하다가 45년 종전후 친일파로 지목돼 쫓겨났다. 비로소 민간정부가등장했지만 수명은 고작 2년.
「피분」이 다시 집권, 10년을 더 권좌에 눌러앉아 군사통치의 궤도를 닦았다.
57년엔 「사리트」 원수가 쿠데타를 일으켜 역시 군벌인「타놈· 키티카초른」을 수상으로 앉혔다.
「타놈」내각이 내분과 재정파탄으로 궁지에 빠지자「사리트」는 다시금 친위쿠데타를 단행, 자신이 수상에 취임하고 「타놈」은 부수상으로 격하시켰다.
63년「사리트」가 병사하자「타놈」은 자연스럽게 승진(?).
71년 의회와 대립이 격학되자 선배「사리트」의 본을따 친위쿠데타를 감행, 집권을 연장했다.
그러나 73년 반정데모를 견디어내지 못했다.
이때의 교훈이 있었다면 독재정권의 부패상이다. 「타놈」 일진의 국내동결재산만해도 당시 싯가로 10억 바트, 약2백억원이었다. 그나마 해외도피재산은 추적조차 못하고 말았다.
73년부터 3년간은 태국 역사상 초유의 민주헌법아래 자유를 구가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75년의 총선거 결과 22개 정당이 난립, 민간내각은 휘청거리다가 77년「크리앙사크」원수의 쿠데타로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정치에 따르지 못하는 민도가 문제였다. 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5백달러정도다.
그러나 「크리앙사크」는 79년의 2차 오일 쇼크로 인한 경제위기를 극복못하고 작년에 자퇴,「프렘」에게 정권을 이양했다. 군부내에서나마 처음있는 펑화적정권교체 (?) 였다.
이런「프렘」내각에 지난 2월 원유도입 스캔들이 퍼졌다. 역시 부패가 문제였다. 국민당소속「차티차이」 산업상이 「사우디」에 가서 원유도입을 교섭하는 동안 사회행동당 소속 「분추」부수상이 「그사람은 교섭권이 없다』는 전보를 「사우디」 석유성에 타전했다. 우당이 원유도입에 따른 배럴당 4달러씩의 수수료를 차지하려고 암투를 벌인것이다.
이런 「프렘」 정권이 1년만에 육군부사령관「산트」의 쿠데타를 맞았다. 명분은 독재예방과 민족주의를 내걸었지만 진급이 늦어진 것이 직접 동기라고한다.
「S· 헌팅턴」 교수에 의하면 태국은 전형적인 『정부내 쿠데타』국가. 기본적인 사회변천이나 협력배분에 변동없이 정부의 주도권만 탈취한다. 「산트」는 「방콕」을 장악했으나「프렘」은 접경으로 피신, 저항을 시도하고 있어 태국사상 초유의 유혈내전이 벌어질 조짐이다.만성적 쿠데타의 결말이 동족상잔이 될지 세계는 지켜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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