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1)|<제73화>증권시장(9)<제자=필자>|지가증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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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많은 반대와 비난 속에서 대한증권주식의사는 어렵게 문을 열었다. 그래도 순전히 우리나라 투자가들 손에 의해서 증권시장을 꾸려 가게 되었다는 뿌듯함이 있었다.
당시 거래된 주식은 주로 경성방직·조선무진·조선철도·조선면자·동아일보사의 주식이 현물로만 거래되었을 뿐 그리 활발한 편은 못되었다.
그러던 중 자리도 채 잡히기 전에 6·25가 터졌다.
전쟁 중에 증권거래가 제대로 이루어질리 없었으나 피난민들이 지니고 있던 지가증권이 증시의 명맥을 유지해 줄 줄이야 어느 누구인둘 짐작했었겠는가.
지가증권이라 함은 1949년6월 정부가 농지개혁법을 만들어 지주들에게 농지 값을 보장해주는 명목으로 발행했던 최초의 공채였다.
과거 일제하에서 전체농가의 56%에 해당하는 땅이 소작농이었던 까닭에 정부가 수립되면서 제일 먼저 토지개혁에 손을 댄 것이다.
소작인들에게는 땅을 돌려주고 지주들에게는 지가증권을 발행했는데 모두 16만9천명에게 15억2친4백원 어치를 발행해 5년 동안 분할 상환키로 했었다.
요즈음 같으면 대기업들이 필요이상으로 지니고 있는 땅을 강제로 팔게 하기 위해 토지개발공사가 토지채권을 발행해 사들이는 것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또 기업들의 재무구조를 개선해주기 위해 토지채권으로 은행 빚을 상계할 수 있도록 한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지가증권으로 지주들이 일본인이 운영하다가 정부에 귀속된 공장 등의 귀속재산을 사들이는데 쓸 수 있도록 했다.
땅에 묶여있는 돈을 기업자금으로 유도하겠다는 의도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6·25가 터지면서 귀속재산의 처리업무는 중단될 수 밖에 없었고 1·4후퇴 이후 대부분이 부산으로 피난 온 지주들은 그나마 지니고 있던 토지증권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형편이 되었다.
생활이 딱하고 급한 사람일수록 싸게 팔았다. 소위 할인율로 따지면 지금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였다.
당시 증권에 좀 눈을 떴던 사람들로서는 여간 유리한 투자가 아니었다.
지가증권을 사고 파는 것이 법적으로도 허용되어 있었기 때문에 싼값에 사모아서 후일 귀속재산의 매입대금으로나 입찰보증금으로 사용하면 액면 가격 전액을 인정받을 수 있었으므로 엄청난 이익을 기대할 수 있었다.
지가증권을 사면 돈번다는 소문이 퍼지자 피난시절의 부산시 광복동 길거리에는 지가증권을 사고 팔겠다는 사람들로 붐볐다.
별의별 이름의 증권회사 간판이 즐비하게 나붙었고 가죽가방 들고 『채권사려-』를 외치고 다니면서 거둬들인 것들로 신흥증권업자를 자처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당시 정부로부터 정식 증권회사 인가를 받은 증권업자는 대한증권주식회사 하나 뿐이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나머지 그 많은 증권회사업자들은 모두가 무면허·가짜증권업들이었던 셈이다.
그렇다고 가짜의 수가 훨씬 우세한 마당에 무작정 단속할 수만은 없는 처지였다. 그 나름대로 시장기능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도 단속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판단아래 가짜중에서 실한 놈을 골라 양성화한다는 방침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신규증권업 면허를 받은 회사는 고려증권·영남증권·국제증권·동양증권 등 4개사로서 기존 대한증권과 함께 모두 5개 증권회사가 지가증권의 매매를 합법적으로 도맡게 되었고 이들이 56년 중권시장 개설 때까지 핵심적인 역할을 해냈다.
나는 당시 재무부 이재국에서 증권담당관으로 있었다. 주요업무 중의 하나가 지가증권의 불법거래를 막는 것이었던 만큼 종종 단속반과 함께 부산시 광복동 골목을 나가야 했다.
순순히 단속에 응하는 사람들도 있는가하면 입에 못 담을 욕설에 심지어는 주먹질까지 하려는 자들도 있어 여러 차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앞서 탄생한 4개 증권회사도 이러한 단속과정에서 드러난 실적을 토대로 골라낸 것이었다. 참고로 지가증권의 거래현황을 보면 가장 피크였던 54년도에는 전체 증권거래의 88%를 지가증권이 차지했다.
55년까지의 총 거래실적을 봐도 지가증권이 71%, 국채 20%, 주식 9%로 나타나 『우리나라의 증권거래는 지가증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규정한다해도 과히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 이후 지가증권은 발행전량이 상환되었거나 귀속재산 처리대금으로 쓰여져 거래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그러나 해방이후 처음으로 우리나라 증권유통의 시발점구실을 충실히 해냈고 증권업 자체도 이를 기반으로 성장해 왔음은 지가증권의 큰 공로라 아니할 수 없다. <계속> 【이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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