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큐레이터 = 동양화 ? 뉴요커들 통념 깬 사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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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뉴욕 프릭컬렉션 내 본인 사무실의 박정호씨. 박씨가 기획한 전시 ‘멘 인 아머’는 10월 26일까지 이어진다.

미국 주류 미술계에서 한인 큐레이터 찾기는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나 다름없다.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의 이소영씨, 필라델피아뮤지엄의 우현수씨 등이 있지만 이들은 모두 아시안 미술을 담당하고 있다. 서양 미술계로 눈을 돌려보면 한인 큐레이터는 더 드물다.

 이런 가운데 샛별처럼 등장한 한인 큐레이터가 있다. 최근 프릭컬렉션에서 개막한 ‘멘 인 아머(Men In Armor)’ 전시를 기획한 박정호씨다. ‘한인 큐레이터=동양화’가 공식 아닌 공식으로 지배하는 분위기 속에서 박씨는 스페인 화가 엘 그레코(1541~1614)를 전시 주제로 다뤘다. 뉴욕 유수의 박물관 중 하나인 프릭컬렉션은 메트박물관·구겐하임 등 대형 박물관보다는 규모가 작아 덜 알려져 있지만 렘브란트·베르메르·벨리니 등 거장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숨은 보석’이다.

 현재 뉴욕대학교(NYU) 박사과정 중인 박씨는 프릭컬렉션의 ‘앤 풀렛 펠로십’ 대상자로 선발돼 이번 전시를 기획하게 됐다. 서울대에서 공부한 뒤 뉴욕으로 건너온 그는 앞서 메트박물관에서도 펠로십을 받았다. 어떻게 한인 큐레이터가 장벽 높은 뉴욕의 서양 미술계를 뚫었을까. 박씨는 큐레이터의 길을 걷기 전, 학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박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 전공을 바꾼 계기는.

 “서울대 정치학과를 다니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배운 것도 많아서 후회는 없다. 하지만 미술에 대한 관심은 항상 있었다. 졸업 무렵에 진로를 고민하던 중, 동기들을 보니 기자가 되거나 고시를 보는 쪽으로 갈리더라. 문화부 공무원을 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으로 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도저히 못하겠더라. 고시 공부를 하면서 좋아하는 미술사 수업을 하나씩 듣다가 재미있어서 아예 그쪽으로 길을 틀었다. 그러다 미술사 석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 어떻게 서양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지.

 “가톨릭 집안에서 자라서 종교화에 관심이 많았다. 종교화 속 도상(圖像·iconography)이 흥미로웠다. 또 부모님께서 문화 쪽에 관심이 많아서 어릴 때부터 미술관을 자주 들락거린 것도 있다.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에 어머니와 함께 멕시코와 페루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본 식민지 시대 건축물과 회화가 굉장히 신선했던 기억이 있다. 스페인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사실 라틴아메리카에서 시작된 것 같다.”

 - 서양 미술은 주로 서양인들 무대인데, 한인(아시안)의 장점이 있다면.

 “문화적 배경이 다른 데서 오는 이점이 있다. 그림을 볼 때 좀 더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는 것 같다. 특히 대인 관계도 중요하다. 한국 사람들, 더 넓게는 아시안들이 항상 예의가 바르고 공손해서 거부감이 많지 않다.”

 - 메트박물관 등에서 커리어를 쌓고 있는데.

 “메트, 프릭이라는 이름값 또한 무시할 수 없고 실제로도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것들을 경험하고 있다. 인적 네트워크도 마찬가지다. 내가 미국서 자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말하기나 글쓰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중요한 기회들을 주고 100%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게 미국, 특히 뉴욕이 아니었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 앞으로 계획은.

 “일단 미국에 있는 여러 미술 기관에서 작품을 많이 접하며 더 배우고 싶다. 그 이후에는 한국이든 미국이든 내가 가장 잘 쓰일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좋은 미술품을 더 많은 사람들하고 같이 즐기고 싶다.”

 글·사진=뉴욕중앙일보 이주사랑 기자

◆코리안 디아스포라( Diaspora)=디아스포라는 전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의 이산(離散)을 지칭하는 말이다.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세계 곳곳에서 뿌리를 내린 한인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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