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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방 감청 폭로되며 궁지 몰린 독일

중앙일보

입력

“우방을 염탐하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던 독일이 우방인 미국과 터키의 주요 지도자들을 감청한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은 독일 정부에 문제를 제기하고, 터키는 앙카라 주재 독일 대사를 불러 해명을 요구했다.

독일 시사주간 슈피겔은 최신호에서 독일 정보국(BND)이 2009년부터 독일이 가맹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들을 감청 목표로 삼았다고 보도했다. 슈피겔에 따르면 BND는 2012~2013년 미 국무장관인 존 케리와 전임자였던 힐러리 클린턴의 암호화된 전화 통화를 감청하고, 2009년부터 터키 정치인들의 통화 내용과 활동을 불법적으로 모니터링했다. 보도가 나간 뒤 케리 장관은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외무장관에게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전해졌다.

BND는 미국 정치인들을 의도적으로 감청하지는 않았다고 해명했다. 케리 장관의 암호화된 통화 기록이 우연히 감청됐다는 사실을 알고 바로 삭제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2012년 당시 미 국무장관인 클린턴과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의 암호화된 통화 내역은 BND 요원에 의해 기록된 뒤 ‘마르쿠스 R’이라고 알려진 요원에게 전달됐다. 이중스파이였던 ‘마르쿠스 R’은 이 자료를 미국에 전달했다.

이 자료는 지난해 10월 미 국가정보국(NSA)이 메르켈 총리의 휴대전화를 도청한 사실이 폭로되며 궁지에 몰렸던 미국 정부로서는 독일의 공세를 맞받아칠 수 있는 대형 호재였다. 당시 독일 정부는 NSA의 도청 의혹과 관련, 베를린 주재 미 대사를 초치하고 메르켈 총리까지 나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을 거칠게 비난했었다. 독일은 지난달 마르쿠스 R 등 이중스파이 2명을 체포한 뒤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CIA 베를린 지부장을 추방하기도 했다.

BND의 도청 폭로는 터키와의 관계에 더욱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독일 정부는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터키 정부에 감청에 대한 해명에 나섰다. 터키와 국경을 맞댄 시리아와 이라크의 내전이 독일 내 테러 위협을 가중시키고 있는데다 미국·유럽연합(EU)에 의해 테러단체로 지정된 쿠르드노동자당(PKK) 활동을 감시하기 위해서는 터키 정치인들의 전화와 활동을 감시할 필요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집권 기독교민주당(CDU)의 외교 전문가인 안드레아스 쇼켄호프는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너 존탁스차이퉁과의 인터뷰에서 “독일에는 300만명의 터키인들이 살고 있고 테러조직으로 분류된 터키계 단체가 적지 않기 때문에 그 단체들이 터키에서 어떤 지원을 받고 있는지 파악하는 건 정부의 당연한 업무”라고 말했다.

그러나 독일 내 터키인들과 야당은 강하게 반발했다. 독일 내 터키커뮤니티 회장인 사프터 시나르는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BND의 감청은 2차 대전 때 미국 정부가 일본과 내통할 수 있다며 일본계 미국인들을 수용소에 가두고 감시하던 일을 떠오르게 한다”고 비판했다.

제1 야당인 사회민주당의 롤프 뮈체니히 의원은 “왜 나토 동맹국인 터키 정부에 직접 테러 관련 정보를 요구하지 않고 터키 정치인들을 감청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녹색당의 콘스탄틴 폰노츠 의원도 “BND의 우방 지도자 도청은 독일 정부에 대재앙”이라며 “정부가 BND의 도청 사실을 알았다면 미국의 도청을 비난한 것은 명백한 위선이며, 만약 몰랐다면 정부의 무능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고 꼬집었다.

정재홍 기자 hong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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