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을 이긴 이색기업(7) 한영날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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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영날염(대표 박종근)은 올해 옷감에 날염(프린트)을 한 직물을 수출해 3백8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이중 86만「달러」어치는 지금까지의 싸구려 하청에서 벗어나 좋은 값을 받고 직수출을 해서 벌어들인 것이다.
특히 63만「달러」어치는 남미에 새 시장을 뚫었으며 날염료도 종전 하청 때보다 2배 남짓 받는 비싼 고급제품을 수출했다.
날염은「패션」(유행)을 파는 업종이다.

<고급제품 수출전념>
따라서 대량생산이 어렵고「바이어」와 날염업자가 직접 만나야 주문에 맞춰「프린트」를 해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중소기업규모의 날염제조업자에게는 직수출을 할 수 있는「쿼터」가 없다.
그래서 이들 업체는 종합무역상사를 통하거나 남미 등 비「쿼터」지역에만 진출할 수 있을 뿐이다.
한영날염이 올해 남미시장을 개척한 것은『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박종근 사장(45)은 겸손해 한다. 『올 봄 한국종합전시장(KOEX)에서 개최된 춘계 교역전에 한평 남짓한 방을 얻어 정성들여 만든 고급날염제품을 몇 점 전시했습니다. 경비 때문에 안내원도 두지 않았는데 한「바이어」가 공장으로 찾아와 한바퀴 돌아보고는 그 자리에서 63만「달러」어치를 계약했습니다.
한영은 이 계약에서 날염료로 종전의 2배 남짓한 좋은 값을 받았다.
지금까지 하청을 받았을 때 날염료는「야드」당 45∼50「센트」가 고작이었으나 직계약으로 1「달러」10「센트」를 받은 것이다.
박 사장은 이 계약을「운」이라고 했으나 이 운이 있기까지엔「세계수준의 날염을 팔겠다 는 남다른 집념이 있었다.
16세에 날염공장 공원으로 출발해 박 사장은 오늘의 자영공장을 경영하기까지 30년 동안 이 집념을 흐뜨리지 않았다.

<해외공장 두루 살펴>
72년도 서울 구로공단에 공장을 세우면서 그는 수십회에 걸쳐 세계 곳곳의 유명한 날염공장을 모두 찾아다녔다.
『「이탈리아」의 어느 날염공장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큰 창고에 날염을 기다리는 원단이 그득했습니다. 모두「메이드·인·코리아」(한국산)였습니다. 당시 한국의 많은 날염공장이 일거리가 없어 걱정들이었는데 그 때 큰「쇼크」를 받았다는 것이다.
금년10월. 모처럼 개방「쿼터」가 나오자 그는 1백여 가지의「샘플」(견본)이 든 보따리를 매고 미주지역 26개 상사를 방문, 23만「달러」어치를 계약했다.
이때 받은 날염료는 하청가격의 3배쯤이 되는 1「달러」40「센트」.
그러나 그는 이번「세일즈」에서 미국의 많은 상사로부터 냉대를 받았단다.
한국제품은 견본은 좋지만 선적해오는 것은 딴판이며 선적기일도 지키지 않는다고 신랄히 비판하더라고 전했다.
「이탈리아」에서 만드는 날염료는「야드」당 최고 3「달러」선까지 받는다. 이에 비해 한국의 날염업체가 받는 하청 날염료는 45∼55「센트」수준에 불과하다. 닭과 달걀 같은 얘기가 될지 모르지만 날염료만 높여주면 고급제품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것이 한영 측의 주장이다.

<미국상사들은 냉대>
폐쇄적인「쿼터」운용에도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최소한 증설되는「쿼터」만이라도「하이·패션」위주로 중소생산업체가 직접수출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이다.
「쿼터」로 묶인 미주 및「유럽」에는 고급제품만을 수출케 하는 강력한 행정지도도 아쉽단다.
『「쿼터」가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쿼터」만 준다면 고급제품을 좋은 값으로 팔 자신이 있습니다』고 박씨는 호소했다.
날염직물은 순환이 빠르고 주문생산이 많다. 따라서 중소기업체에서 기동력을 발휘할 수 있다며 정책적 배려를 거듭거듭 강조했다. <박병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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