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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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거의 10년전 일이다. 어느 문학 잡지사에 들렀는데 그때 소설가 L씨가 시조시인 누군가와 무슨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무심코 흘려듣다 보니 그들은 그 무렵 어딘가에 발표된 내 작품을 두고 이러쿵 저러쿵하는게 아닌가. 나는 바짝 귀를 곤두세웠다.
『그게 무슨 작품이야, 그걸 그래 시라고 내놓은 거야?』L씨의 말이었다. 서로가 모르는 처지였던 탓이었다.
나는 쫓기듯 그곳을 나오고 말았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흐르는 것 같다. 창피함과 알지 못할 어떤 울분같은 것이 치솟아 얼굴은 확확 달아올랐다.
그렇잖아도 건강 때문에 가정이며 사회로부터 서서히 밀려나거나 단절되고 있다고 느끼던 그런 때였다. 몇년을 계속한 투약과 주사, 그런 것들에 깅글징글 시말린 끝이라 내 몸뚱이는 걷잡을 새 없이 무너지고 있을 때였다.
그럴 무렵 부딪쳐온 새로운 벽, 그것은 내 영혼까지 좌절시키기에 충분했다. 그까짓 일축해 버리면 될 것을 그러지도 못하고 실의에 빠져버렸다. 그러면서도 불끈불끈 치솟는 화는 가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신문 한 귀퉁이에서<신춘문예>모집광고를 보게 되었다. 순간 『그렇지, 저기 도전(?)해 보는 거다.』일종의 자구책이랄까, 나는 내 자신을 재평정해야 한다는 절박감을 느꼈다.
그때부터 다시 시작하는 자세로 평론집은 물론 미학·철학·음악·미술·과학·성경·불경·시경에 이르기까지 닥치는대로 읽었다. 책 속에는 나를 일깨우는 많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만나면서 조금씩 새로운 용기와 자신을 얻게 되었다. 조심스레 응모했다.
이 시험대에서 밀려나면 아예 내 모든 것을 완전히 포기하리라.
그런데 행운의 여산, 구원의 여신은 내 손을 잡아주었다. 당선된 것이다.
내가 내 아내를 만난 것도 구원의 여신이 내편이 되어 준 후의「보너스」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면서 새삼 느끼는 바지만 중앙문예 출신과 한식구가 되었다는 사실에 긍지를 갖는다.
시조 시단에서 그들의 활동과 역장은 누구나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토속성이 짙고 현장 의식이 강한 김시종(67년 당선), 사설시조로 새로움을 모색하는 김상묵(68년),자유시를 겸하면서 더욱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이시영(69년), 승려시인 역성우(71년), 저력의 김종(72년), 이현우(74년), 유문동(75년), 김창문(76년)씨, 그리고 깔끔한 동화작가로도 알려진 강나연(본명 최영희)(77년), 패기만만한 신인 장식환(80년)씨 등이 중앙문예를 더욱 빛내주고 있다.
이맘때가 되면 나는 새삼 L씨가 생각나고 그에게 내심 고마움을 보낸다. <시인·73년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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