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인권정책의 이중잣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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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권리를 가진다는 것은 인권의 기본개념이다. 그래서 인권은 보편적 가치로서 '개인주권'으로까지 불린다. 올해는 1993년 빈에서 개최된 세계인권회의가 이러한 인권개념을 보다 효율적이고도 광범위하게 실천하기 위한 '빈선언'을 채택한 지 10년이 되는 해다.

'빈선언'이 채택된 이래 10년간 유엔과 인권단체들이 인권 분야에서 이룩한 업적은 실로 괄목할 만하다. 이제 인권은 국제사회의 당연한 관심사가 됐고, 어떤 국가도 유엔 인권기구가 개별 국가의 인권상황을 토의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하는 것을 국내 문제 불간섭 원칙을 이유로 거부할 수 없게 됐다.

*** EU서 먼저 제기한 北인권상황

이번 EU의 이니셔티브로 제출된 북한 인권상황을 규탄하는 결의안이 현재 제네바에서 진행 중인 제59차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세계 여론의 주시 속에 한국이 투표에 불참한 가운데 채택됐다는 사실은 극히 주목된다.

현재 세계 1백90여개 주권국가 중에서 인권이 가장 비참하게 유린되고 있는 나라를 꼽는다면 북한과 이라크가 으뜸일 것이다.

최근 이라크에서는 25년에 걸친 무자비한 후세인의 독재정권이 희생이 많은 전쟁을 통해서나마 군중의 환호 속에서 몰락했다는 사실은 인권을 유린하고 국민 위에 군림하는 독재정권의 필연적인 말로를 극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오늘날 인권보호의 성전이 되고 있는 세계인권선언과 국제인권규약이 인정하고 있는 기본적인 인권-국민이 정치 지도자를 자유롭게 선출하고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가지며 자국을 마음대로 떠나고 돌아올 수 있는 원초적인 권리마저 유린되고 있는 북한 인권상황이 그동안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한번도 다뤄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이번 EU가 제출한 결의안이 지적하고 있듯이 현재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조직적이고도 광범한 인권침해의 실상'에 대해 그동안 많은 국제 인권단체와 세계 지성인들이 우려와 비판을 제기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인권상황이 지금까지 유엔 인권위 차원에서 규탄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김대중 (金大中) 정부의 '햇볕정책의 이중성'과 무관하지 않다.

지난 수년간 한국은 국제 인권단체들과 우방,특히 EU의 적극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북한 인권 토의에 소극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미얀마 인권규탄 결의안에는 공동 제안국으로 가담하면서도 중국 관련 결의안에는 상정을 위한 절차문제에서조차 기권하는 이중잣대를 보였다.

오늘날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북한 주민의 열악한 인권상황은 우리가 대책을 강구해야 할 시급한 현안임에도 불구하고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가 오히려 바깥 세계에서 더 크게 제기되고 있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우리 국회와 정부가 침묵하고 있는 동안 미국 의회는 지난해에 탈북자 보호를 위한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한 데 이어 올해도 북한의 인권유린 상황을 제59차 유엔 인권위에 상정하도록 국무부에 강력히 요청했다.

국내 인권단체도 국제 인권단체와 제휴해 북한 인권상황을 국제적 이슈로 제기함으로써 북한의 인권상태 개선을 위한 국제적 노력에 동참하고 있다.

*** 국제사회가 눈 부릅뜨고 있는데

정부의 대북 정책에 있어 핵문제를 포함하는 남북 간의 정치적 대화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면서 북한의 인권문제가 차지하는 우선순위를 설정하고 국제사회가 갖는 심각한 우려에 우리 입장을 정립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EU 결의안이 제시하고 있는 북한의 기본권 유린, 즉 정치적 이유에 기인한 사형, 정치범 수용소와 강제노동, 불법 처형, 탈북 강제 송환자에 대한 박해, 북한 어린이들의 영양 부족과 여성의 기본권 침해 등 조직적이고 광범한 인권유린에 당사자인 우리가 정치적 고려를 이유로 침묵하고 방관만 한다면 국제사회는 한국이 표방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존중 정책에 깊은 의구심을 갖게 될 것이다.

朴銖吉(서울대 초빙교수/ 前유엔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