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전전-전후 세대가 보는 한일 양국의 상호견해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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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내가 아직 어릴 무렵 일본은 대동아건설을 외치며 이른바 대동아 전쟁을 시작했다.
처음 그들은 승전을 거듭했다. 「싱가포르」함락 때 어린 나는 일장기를 흔들며 깃발대열에 끼어 촌가를 누비고있었다.
일본군가를 부르며 생기에 찬 일본인 교사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후 여학교시절에는 거듭되는 군복 만들기 작업· 운모(비행기의 부품) 작업· 방공훈련·신사참배·일어전용 등에 시달렸다. 일본인교사는 조금만 이상해도 우리의 사상을 의심했다.
이런 속에서 가정마다 오빠들의 징병, 아버지들의 징용. 심지어는 언니들을 여자 정신대로 바쳐야했다.
우리 집은 대지주인 할아버지를 미워한 일본인들 때문에 서울로 이사했다.
이러던 일본이 어느 날 갑자기 무조건 항복을 한지도 올해로 35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 흐른 지금 새삼스럽게 옛날 일들을 끄집어내어 일본을 원망하고 싶지는 않다고
그러나 그들은 패전 후 우리를 어떻게 대해 주었던가? 전승자들에게는 고분고분 양처럼 말 잘 들으며 공손히 봉사했고 『패전은 곧 승전』이었다고 자위하며 경제대국으로 자랐다. 우리의 6·25는 그들을 더욱더 부자로 만들어주었다.
50고개를 넘어선 지금도 나는 아직 그들을 개운한 우정으로 받아들일 수 없음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들에 대한 피해망상이 너무나 마음속 깊이 깊이 자리잡고있어 상흔이 좀체 가셔지지 않는다.
그들이 우리의 독도를 죽도라고 부르며 자기네 영토라고 군침 삼킬 때 정말 며칠동안 밥맛을 잃을 정도였다.
일본을 경계하면서도 「이웃사촌」으로 지내야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우리의 운명인 것 같다.

<주부·53세>

<막연한 적개심은 금물|정확한 실상을 알아야>
어렸을 때 철없이 즐겨 부르던 노래가 문득 생생하게 떠오른다.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
무슨 뜻인지 생각지도 않고 아주 즐겁게 불렀다. 그뿐인가, 이 노래에 맞추어 고무줄놀이·짝짜꿍 놀이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학교를 다니면서부터 비로소 이 노래가 결코 즐겁지 않은, 즐거울 수만은 없는 노래임을 알기 시작했다.
책을 통해서만이 깨닫고 희미하게 분노할 수밖에 없는 세대가 바로 우리전후 세대들이다. 일본에 대한 무의식적인 적개심으로 출발한 세대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 「무의식적인 적개심이 이야말로 우리세대가 경계하지 않으면 안될 감정이다. 저네들의 실상을 알지 못하고 막연히 미워하기만 하다 보면 그 적개심은 어느 순간 엔가「막연한 호기심」으로 발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에서 흔히「이코노믹·애니멀」로 불리는 저네들이 한국을 보는 눈에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언제든 필요에 따라 한국을 이용하겠다는 은밀하면서도 얄팍한 계산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야한다.
우리 전후 세대들의 그「무의식적인 적개심」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차차 변색되고 우리의 다음 세대에 이르러 그나마 국사 책에 나오는 몇「페이지」의 시험예상문제 정도로 생각하는데서 그치게 된다면 일제36년의 질고에 대한 현실적인 보장은 둘째 치더라도 그 정신적인 보상은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거리를 당당하게 활보하는 일본관광객들. 「기생관광」 이라는 단어가 저네들에 대한 현실적인 적대감을 더욱 높여주는 구실을 하지만 그처럼「보이는 것」에서 보다「보이지 않는 것」에 더 무서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야할 것 같다. <주부·29세>

<가끔 옛날동창들 생각|훌륭한 상품보고 놀라>
2차 대전이전 나는「시모노세끼」(하관)에 있는 여학교 (고등학교) 학생이었다.
같은 반에 이양이라는 한국인「클래스·메이트」가 있었는데 지금도 불현듯 생각날 때가 있다.
어디에 살고 있을까. 나처럼 손자들에 둘러싸여 재롱떠는 모습을 보면서 살아가고 있지 앓을까.
종전 후는 패전의 잿더미 위에서 살아나가는 것이 생활의 전부였기 때문에 그 뒤는 한가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최근에는 신문·TV 등에서 한국에 대한「뉴스」가 쏟아져 나오고 있고 내 아들도 가끔 한국을 다녀와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나도 한국에 한번 가서 옛 동창들을 만나보았으면 하는 생각도 해본다.
살림살이는 매우 발전되고 있다고 듣고 있으나 막연한 생각이긴 하지만 어쩐지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나라인 것 같기도 하다.
아들이 금년 봄에 며느리와 함께 한국을 다녀왔지만 갈 때는 『부디 몸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한국에 대해 알 길이 없고 신문·TV등에 소개되는 한국이 내가 아는 한국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며느리가 한국을 다녀왔을 때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놓기도 했다.
한국인의 생활상태는 일본보다는 다소 뒤떨어지겠지만 그렇게 비참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다.
아들이 한국에서 사온 양복·구두 같은 것을 보고는 한국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그동안 많이 발전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다음에 아들이 한국 갈 때는 나도 꼭 같이가 한국을 한번 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주부·69세>

<한국 의상은 퍽 인상적|친근한 마음 잘 안 들어>
한국에 대해서는 평소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별로 아는 것이 없다.
한국을 처음 인식한 것은 초등 학생 때 언니가 한국인 친구로부터 선물 받은 한국인형을 보고서부터다.
치마· 저고리를 입고있는 인형에서 본 한국의상은 퍽 인상적이었다.
일본의상과는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고 동경 같은 것을 느낄 정도였다.
그 뒤 한국여자를 처음 만났을 때 한국인은 사치가 없고 검소하며 물건을 소중히 여기는 민족인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고대 불교문화 등이 한반도를 통해 일본에 전래되었다는 사실 등은 배워서 알고있으나 지금의 한국은 어쩐지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요꼬하마」(횡빈)의 「차이나·타운」에 들어서면 무언지 무시당하는 것 같고 「레스토랑」에서 만나는 중국인도 어쩐지 접근하기 힘든 사람 같은 감이 있는데 한국에 대해서도 이와 똑같은 감정이 든다.
한국에는 빈부의 차가 우리보다 심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가난한 집안의 젊은 여성들에 대해 궁금한 일이 많다.
가수 이성애 씨의 『가슴 아프게』를 듣고 한국인은 노래 등 예능에는 뛰어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국상품이 일본에도 많이 수입되고 있다고 듣고는 있으나 막상 「캐러멜」 「잼」 등을 사먹어 본 후 한국 제라는 것을 뒤늦게 알고 한국에서도 이 같은 훌륭한 상품을 만들고 있구나하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한국은 미국보다 더 먼 나라 같은 느낌인데 이는 한국에 대해 큰 관심이 없고 또 별로 접촉도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회사원·2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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