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역한 수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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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과학적인 물적 증거 없이 자백만으로 「범인」을 만들어 사건을 종결지으려는 경찰의 안이한 졸속 수사가 크게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경찰의 「범인체포」발표가 있은 지 며칠 후 진범이 나타난 서울 구의동 여인 피살사건이라든지, 끝내 범행을 입증할만한 물증을 제시 못해 구속영장 청구조차 못하고 있는 부산 연산동 일가족 4명 살해사건 등은 경찰수사의 무능과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 대표적 사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진범이 체포되지 않았더라면 아내를 죽인 흉악한 살인범으로 낙인찍힐 뻔한 구의동 사건의 윤용국씨의 경우 구속영장을 신청하면서 경찰이 혈흔이라고 제시한 증거가 윤씨의 한복바지에 묻은 음식 찌꺼기였다니 실로 국립경찰의 현주소를 의심케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윤씨가 구속된 후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2차 진술 때부터 범행사실을 부인했는데도 일체 이를 묵살했다는 것은 피의자의 인권은 제쳐둔 채 고압적인 우격다짐으로 검거 실적만을 쌓으려는 경찰수사의 가식적 태도를 드러낸 단면인 것이다.
졸속수사의 희생자들은 이 밖에도 허다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형사반장 부인 살해사건의 범인으로 구속 기소되었던 최규성씨가 그랬고, 부산 칠산동 여인토막 살해사건의 범인으로 검거되었던 「보일러」에 정상규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법원의 공식통계에 따르면 1번 형사공판사건의 무죄인원은 방년의 3백 74명에서 78년에는 4백62명으로 크게 늘어났다고 한다. 무죄 율도 0·34%에서 0·54%로 늘어났다는 것인데 이것은 경찰의 생사람을 잡는 주먹구구식수사가 개선은커녕 오히려 타성화 되어왔다는 반증인 셈이다.
경찰의 이 같은 졸속수사의 1차적 원인이 기동력을 비롯한 과학적 수사장비 및 전문적 수사요원의 만성적 부족에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날로 광역화· 기동화· 흉포화 하는 범죄추세에 대처할 경찰의 수사력 배강이 그 동안 너무나 미흡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경찰의 인원 및 장비보강과 합께 특히 수사요원들이 마음놓고 그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수 있도록 신분보장과 처우개선 등 일련의 사기 진작 조치를 누차 촉구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졸속수사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일선수사관들 사이에 만연된 인권 경시풍조에 있다는 것이 더욱 심각한 문제점인 것이다.
이런 풍조가 어디서 연유한 것인지 따져볼 체제는 아니지만, 공명심과 수사실적에만 급급해서 우선 잡고 보자는 식의 무책임한 수사태도가 어떤 명분에서건 이상 더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은 시대적 추세에 비추어서도 당연한 일이다.
함부로 인권을 유린하는 수사가 무위 무책한 것 보다 오히려 유해하다는 점에서 뿐 아니라 지금 우리가 지향하는바 정치발전의 궁극적 목적이 인권의 존중과 그 확대에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일선 수사관들에 대한 인권에 대한 인식의 제고와 함께 경찰의 수사권남용으로 억울하게 곤욕을 치른 시민들에게 대한 법적인 구제방안도 차제에 강구되어야 합 것이다.
구속 중에 당하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더하여 무혐의로 풀려난 뒤 일자리를 잃는 등 피해를 보는 데도 국가에 대해 아무런 보상침구도 못한다는 것은 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경찰은 『열 사람의 범인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사람의 억울한 죄인을 만들지 말라』 고한 법언의 의미를 되새겨 과학적인 수사기술의 발전을 통해 원시적인 졸속수사로 실추된 명예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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