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 앞둔 황동규 시인 '독자들과 여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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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바람!/땅가죽 어디에 붙잡을 주름 하나/나무 하나 덩굴 하나 풀포기 하나/경전(經典)의 글귀 하나 없이/미시령에서 흔들렸다.//풍경 전체가 바람 속에/바람이 되어 흔들리고/설악산이 흔들리고/내 등뼈가 흔들리고/나는 나를 놓칠까봐/나를 품에 안고 마냥 허덕였다."('미시령 큰바람'중)

강원도 인제에서 가로막힌 태백산맥을 넘어 확 트인 동해바다로 넘어가는 미시령에는 항상 큰바람이 불고 있다. 뭍에서 바다로 통하는 바람 터널 미시령에서 사람들도 일상에서 자연으로 간다.

온 몸 날아갈 듯한 바람 맞으며, 아랫자락 양지녘은 봄인데 꼭대기는 아직 눈 덮여 겨울인 설악의 풍광을 바라보며 수많은 상춘객(賞春客)들은 가슴 속에 무엇을 담고 버리는가.

서울대 교수직의 정년을 몇 달 앞에 둔 황동규 시인이 그의 시의 고향이랄 수 있는 강원도 일대를 찾았다. 일반 독자 60여명과 함께 지난 12~13일 미시령.고성 통일전망대.오색 등지를 둘러보며 퇴직이나 늙음 등으로는 결코 멈출 수 없는 삶, 특히 이 좋은 계절 풍경과 삶과 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항상 삶을 새롭게 살게 일깨우는 것이 바람입니다. 죽기 전까지는 새롭게, 열심히, 끝까지 살아라 가르치는 것이 바람입니다. 등뼈가, 승용차가 흔들릴 정도의 바람 속에서, 눈부시게 아름답고, 회 쳐 먹고 싶은 정도로 싱싱한 이 자연의 풍광 속에서 나는 계속 새롭게 태어나는 삶을 맛보고 있습니다."

시인의 말은 다시 이어졌다. "추억은 추억대로, 앞날에 대한 다짐은 다짐대로 싱싱하고 힘있게 지금의 여행을 이끌고 있지 않습니까."

설악과 동해안 가득한 상춘객들. 도회지와 교수의 틀에 갇힌 삶에서 벗어나 여행 중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만난 풍광에 대한 울림의 시로 틀 없는 인간을 노래하며 황시인은 익어가고 있다.

현역 '고급 시인'중 가장 사랑받고 있는 황시인은 여행에서 만난 풍경, 삶의 길에서 만난 좋은 사람과 함께 우리와 세상은 좀더 좋고 깊게 바뀌는 것이라며 오색에서 한 잔 기울이며 쓴 이런 시를 들려줬다.

"오미자 한 줌에 보해소주 30도를 빈 델몬트 병에 붓고/익기를 기다린다/아, 차츰차츰 더 바알간 색, /예쁘다. /막소주 분자(分子)가/설악산 오미자 기개에 눌려/하나씩 분자 구조 바꾸는 광경. /매일 색깔 보며 더 익기를 기다린다."('오미자술'중)

강원도 오색=이경철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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