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물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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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54년 이른 봄, 나는 완성된 『춘향전』의 「시나리오」를 들고 서울로 올라왔다.
문학잡지 「문예」사 사원이던 하한수(지금의 영화감독)의 하숙에 거처를 정하고 이철혁을 찾아 『춘향전』 제작의 동인으로 가담시켰다. 일본 조도전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이철혁은 6·25전에 내가 감독했던 『갈매기』제작에도 관여했으며 그뒤 조미령과 결혼, 신당동에 신혼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춘향전』을 제작하겠다는 전주는 선뜻 나서지 않았다. 초조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날, 종로 「파고다」공원앞을 지나는데 옛날 나의 첫영화 『임자없는 나룻배』를 제작할때 알았던 김재중을 우연히 만났다.
김재중은 대법원장인 술인 김병노의 아들로 『임자없는 나룻배』를 제작할 땐 보성전문학교(고려대전신)학생으로 사각모를 쓰고 촬영현장을 따라다니며 영화제작을 구경했던 사람이었다. 김재중과의 해후는 20여년 만이었다.
김재중과 부근 다방엘 들어갔고 거기에서 『춘향전』의 영화화얘기가 나왔다. 내 얘기를 듣던 김재중은 빙그레 웃으며『그럼 그 영화를 내가 제작하면 어떨까요』했다. 우연히 그를 만나, 우연히 꺼낸 얘기로 어렵게 구하던 전주를 쉽게 찾아낸 셈이었다. 이렇게 해서 『춘향전』의 제작은 김재중이 맡게 됐다.
『춘향전』은 55년1월16일 국도극장에서 개봉돼 공전의 흥행기록을 세웠으며 국산영화의 기업화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상영시간이 2시간15분으로 그때까지 나온 우리나라 영화 가운데 가장 긴 작품이었다. 그런 『춘향전』이었지만, 제작 과정에 있어선 우여곡절 많은 시련을 겪어야만 했으니, 그 얘길 하지 않을수가 없다.
54년3윌초 장교동에 제작본부로 쓸 사무실을 차리고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우선 「스태프」를 짰다. 촬영에 유장산, 조명에 고해진, 소품에 정응삼, 녹음에 이경순, 음악에 당시 국립국악원부원장이던 성경린으로 정했다. 그리고 조감독에 전지목(퍼스트) 하막수 정일자 최훈으로 진용을 짰다.
「캐스트」는 이몽룡에 이민, 월매에 석금성, 월매의 동생 월선에 한은진, 변학도에 이금룡. 방자에 전 택이, 향단에 우경희, 운봉영장에 서월영등 호화배역으로 짰다.
그러나 막상 주인공인 「춘향」역에 마땅한 여배우가 없었다.
신인을 쓸 생각으로 촬영기사 유장산과 함께 신촌 이화여대앞으로 갔다. 여대생 중에서 신인을 한사람 「픽업」할 작정이었다.
정문에 꼼짝않고 붙어서서 드나드는 학생들을 살피는데, 고역이었다. 얼굴만 보는 것이 아니라 키·체격·태도까지 살피려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한나절 수백명의 학생들을 살피고 나니 피곤해서 현기증이 났다. 결국 이화여대 앞에서의 춘향 물색은 실패로 돌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 낸 여배우가 조미령이었다.
처음부터 그녀를 생각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조미령의 키가 작은 것이 결점이어서 꺼림칙했던 것이다. 근래서 한가지묘안을 생각해냈다. 당혜(당혜)신 바닥을 10여cm 높이는 것이었다. 치마가 기니까 무난히「카무플라지」가 될 것 같았다.
진용이 짜여진 뒤, 나는「스태프」4명과 함께 지방「로케」장소 「헌팅」에 나섰다.
우선 남원을 가보니 주위의 정서가 도저히 당시의 분위기를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구로 나와 경치가 뛰어나다는 경북달성군가창면을 찾아갔다. 겹겹산골인 가창면냉천동으로 들어서니 「로케」장소로
안성마춤인 동네가 나타났다.
주위 풍광은 말할 필요도 없으려니와 춘향의 집으로 쓸 덩그런 기와집도 한채있었다.
이렇게 해서 7월초, 촬영에 필요한 모든 장비를 마련해「스태프」·「캐스트」등 50여명의 대부대가 첩첩산골 냉천동으로 들어갔다.
냉천동에 여관이 없어 일행은 모두 민박했다.
냉천동은 갑자기 밀어닥친 외지의 낮선 사람들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근처에 있던 달성광산이란 중석광산에서 전기를 끌어들이고, 큼직큼직한 「세트」가 이곳저곳에 세워졌다.
촬영의 요란한 소문은 대구에 까지 『가창의 냉천동에 큰 공사가 시작되었다』고 잘못 알려져, 대구시내 유명한 술집 몇군데에선 작부까지 동원, 냉천동에다가 대형 천막을 치고 분점을 차리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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