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이니」의 왼팔·오른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이란」혁명평의회의 윤곽이 최근 드러난데 이어 막후실력자의 면모도 차차 밝혀지고 있다. 혁명평의회의 정점은 「호메이니」. 이 「호메이니」의 막후에서 그를 보좌하고 정책결정에 큰 영향을 주는 측근 인물 중 특히 「고트브자데」외상 「베헤시티」 혁평사무총장 「바니-사드르」 전외상 및 「모우사비·호에이니」라는 성직자가 두드러지고 있다. 이들중 최근까지 「바니-사드르」 전외상이 「호메이니」다음의 제2인자로 알려졌으나 「고트브자데」에 의해 대체됨으로써 세력판도가 뒤바뀐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편집자주>

<「호」망명시절 대변인노릇…강경파의 입>
「이란」 국영방송 사장으로 보수파의 입장을 대변해왔다. 미국과 「프랑스」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호메이니」의 「파리」 망명시절 그의 대변인 노릇을 했다. 「호메이니」가 「파리」에 망명하기전부터「이란」의 반「팔레비」활동을 하며「바니-사드르」와 주도권을 싸고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
혁평위원으로서 미대사관 인질사태 이후 「바니-사드르」와는 대조적으로 강경입장을 취해 학생들과 동조하여 그들의 요구를 방송으로 전달하는데 앞장서왔다. 최근 몇주동안 「바니-사드르」전외상과 막후 권력투쟁을 벌여온 것으로 알려져 왔다. 외상과 방질사장을 겸하고 있다.

<「소르본」대 다닌 온건파 좌경경제학자>
29일 외상직을 물러나기까지는「호메이니」다음의 실력자로 알려져 왔었다. 60년대 학생으로서 반「팔레비」투쟁을 벌여 두차례 옥고를 치른 뒤 16년간 망명생활을 했다. 「프랑스」「소르본」대학에서 공부한 좌경경제학자로서 「호메이니」망명시절 대변인 역할도 했다.
혁명세력중 비교적 온건노선을 취해온 그는 외상·재무상을 겸직하며 미은행으로부터의 「이란」예금 인출과 석유대금 「달러」화 결제거부등의 결정을 내렸다.
주도권다툼에서 「고트브자데」에게 밀려 외상직을 내놓기는 했지만 재무상직은 그대로 맡고 있다.

<팔레비치하서도 일역, 제1대통령후보>
혁명평의회 사무총장으로서「아야툴라」의 한 사람. 「호메이니」 보다 더욱 보수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회교공화국 헌법을 기초한 인물로 혁명초 혁명재판에도 관여하여「팔레비」치하관리들의 처형을 강력히 지지했다.
미대사관 인질사태후 실각한「바자르간」 내각의 정책에 많은 제동을 걸었다.
학생들의 미대사관 점거를 계속하도록 결정한 주역으로알려져있다. 「팔레비」치하에서 문교부자문을 지내고서도「함부르크」의「이슬람·센터」를 운영한「엘리트」로 회교공화국의 대통령후보로 나설것으로 점치는 관측통도 있다.

<미대사관점거계휙 참여, 학생들과 밀착>
최고 성직인 「아야룰라」 의 바로 아래직급의 종교지도자.
혁명평의회의「멤버」는 아닌 것으로 알려져있으나 학생들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수개월전「호메이니」에 의해 국영방송의 종교문제 고문으로 임명되었으며 미대사관 점거계획수립에 참여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미국소식통들은 그가 대사관 점거학생들과 「호메이니」 에게 직접 연락역할을 맡고 있으며 어떤 인물이라고 점치기는 힘들지만『소장종교지도자들중의 상승주』라고 평가하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