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의 소리] 편견에 치이는 혼혈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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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 학교 안 다니겠어요. "

전화상담에서 가장 흔히 듣는 혼혈 학생들의 말이다. 어려운 여건상 자주 만나지 못해 겨우 전화를 통해 털어놓는 고민에 가슴이 내려앉는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다.

얼굴색이 다르고 아빠가 없고 가정형편이 너무 어렵고…. 소위 '왕따'를 당하는 이유는 열거하기도 어려울 만큼 많다.

이 힘겨운 '전쟁'에 이기지 못하고 초등학교부터 학업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 가까이서 지켜보는 마음을 한없이 아프게 한다.

*** "따가운 시선이 가장 힘들어"

펄벅재단 소속 혼혈 아동들은 주한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이들이 대부분이다. 한국을 떠난 아버지와 소식이 단절된 채 미군 기지촌 주변에서 어머니나 조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한국인과 다른 생김새와 경제적 궁핍, 출생 자체에 대한 편견으로 몹시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최근에는 동남아시아 출신 근로자와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시아계 혼혈 아동들도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으나 열악한 작업환경과 비현실적인 임금, 편견과 멸시 등으로 이들이 겪는 어려움 또한 서양 혼혈 아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

1947년 미군이 이 땅에 주둔하면서 시작된 혼혈인의 출생은 기지촌 양산과 궤를 함께 한다. 역사의 어두운 그늘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혼혈인이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돕는 여러 대책을 세우기보다 주로 해외 입양이나 이민 등을 해결책으로 삼아온 것이 사실이다.

80년대 중반 편견과 냉대, 가난에 지친 2천여명의 혼혈인들이 다시는 한국땅을 밟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이 땅을 떠났다.

해외 가정으로 입양된 혼혈 아동은 3천여명을 헤아리지만 국내 가정에 입양된 혼혈 아동은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다. 21세기 지구촌 시대에도 혼혈인을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적극 수용하려는 움직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단일민족의 우수성을 교육하는 한국 사회는 혼혈인을 오히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출생'으로 여기게끔 암묵적으로 강요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까닭에 고아들의 국내 입양이 늘어가는 요즘에도 부모가 돌보기 어렵거나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혼혈 아동만은 여전히 예외다. 이처럼 뿌리깊은 사회의 편견과 차별을 혼혈인의 개인적 의지로 돌파하기란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펄벅재단이 재작년 재단에 속한 혼혈 아동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초등학교 미취학 및 중퇴가 9.4%, 중학교 미취학 및 중퇴가 17.5%나 된다.

혼혈 아동 1세의 경우 83%가 편모 슬하에서, 나머지 17%는 조부모나 이웃들이 양육하고 있으며 양친과 살고 있는 아동은 단 한명도 없다. 의무교육마저 중도 포기하는 이들의 미래가 결코 낙관적일 수 없는 것은 불보듯 뻔하다.

그러나 정작 혼혈인들은 이처럼 어려운 여건보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과 편견이 가장 힘들다"고 털어놓는다.

세계화를 부르짖는 이 땅에서 이들이 설 곳은 아직도 좁기만 하다. 영어를 모르고, 김치를 좋아하는 대부분의 한국 혼혈인들이 미국으로 가고 싶어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민이나 해외 입양으로 이 땅을 떠나는 것이 결코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이민을 떠난 혼혈인들은 오히려 2중고를 겪고 있다.

일반 이민자들과 마찬가지로 언어와 타 문화 적응에 대한 어려움으로 그 사회에 쉽게 정착하지 못하는 데다 교포사회마저 국내와 마찬가지로 '순수 혈통'을 지향하는 탓에 또 다른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어우러짐 위한 대책 내놔야

한국 국적을 가지고 우리말과 우리 음식을 사랑하며 우리 땅에서 살고 있는 이들은 분명 배달민족의 자손이다. 이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질시를 마냥 방치해서는 안된다.

이들이 우리 사회에 당당한 시민으로서 통합되고 적응하기 위한 대책을 정부는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혼혈 학생의 학업 중도 탈락 방지를 위한 계속교육 프로그램, 혼혈인의 자립을 위한 직업교육 및 고용정책, 혼혈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변화를 위한 홍보정책 등은 당장 시급한 것들이다.

우리들도 이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행동을 하지 않았는지, 혹시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봐야 할 일이다.

이지영 (펄벅인터내셔널 한국지부 사회복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