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상의 게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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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돈황(돈황)은 중국서북방 감숙생에 있는 고도다. 중국에서 중앙「아시아」로-가는 첫 길목에 자리잡아 동서로 내왕하는 옛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었다.
이 돈황의 동남쪽 오사산에는 바위를 뚫고 석굴을 만들어 불상을 모셔놓은 천불동들이 있었다. 그 수가 무려 3백여개나 된다고 한다.
이런 석굴사원은 물론 이곳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돈황의 경우는 다르다. 위로는 북위시대로부터 아래로는 당·송대에 이르기까지의 불상과 벽화가 무수하게 간직되어 있었다. 중국불오사의 더없이 귀중한「역사의 창고」나 다름없다.
이 수많은 동굴 가운데서 누가 언제 넣어둔 것인지도 모를 고서더미가 주지 왕도사에 의해 발견되었다. 먼 옛날도 아닌 l900년 무렵의 일이다. 왕도사는 캐캐묵은 이문서 더미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상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청말기의 중국정부는 『보관이나 잘하라』는 훈령만 내리고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일이 뒤늦게 영국의 간양사학번 「M·A·스타인」에게 알려졌다. 그 길로 달려간「스타인」은 왕도사를 설득해 비로소 석실의 문을 열었다. 순간, 「스타인」은 앞이 캄캄해 지는 것 같았다고 한다. 천년도 더된 고서와 문서들이 산적해 있는 것에 놀란 것이다.
「스타인」은 그 가운데 중요해 보이는 것들을 추려 24개의 고리짝에 넣어 영국으로 옮겨갔다. 오늘 대영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 이듬해인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폴·페리오(백포화)도 「아시아」탐험길에 이 소문을 듣고 돈황으로 달려갔다.「스타인」보다 한문과 중국역사에 밝던「페리오」는 역시 왕도사를 달래어 5천종의 고서와 문서를 「프랑스로 가져갔다. 당·송이래의 진귀한 불경이나 그밖의 사본들이었다. 이것은 지금「파리」의 국민도서관과 「기메」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신라 고승인 혜초의 그 유명한 『왕오천축일국전』은 바로 이「페리오가 찾아낸 것이었다.두루마리 모양의, 그나마 첫머리가 띨어져 나간 이 무명의 문서를「페리오」는 집요한 연구끝에 혜초의 것임을 밝혀냈었다. 1908년에 집필한 『중국감숙생에서 발견된 중세기의 한 서고』가 바로 그 문제의 논문이다.
이 무렵까지도 혜초가 누구인지조차 몰랐던 사실을 상기하면 어이없는 일이다. 더구나 이글에 처음으로 주석을 불인 학자가 일본인 「후지따」(등전풍팔)였던 것을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진다.
이번엔 그 「스타인」의 돈황문서「컬렉션」가운데서 역시 신라의 고노 무상비사(김화상)의 『게송』(게송-부처의 공덕을 찬미한 노래)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무상은 이미 일본불문학자들의 깊은 연구대상이 되었던 고참이었다. 새삼 우리학자들의 연구도 좀더 깊어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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