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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쏠림, '양털 깎기'의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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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윤 기자 중앙일보 편집국장
김종윤
중앙SUNDAY 경제산업에디터

지금까지는 묘했다. 나가지도 못하고, 돌아설 수도 없는 꽉 막힌 터널에 갇힌 답답함. 박근혜 정부의 한국경제호(號) 처지가 이랬다. 새 정부가 출범하면 경제부문에서도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게 그동안의 공식이었다. 정권 초기의 풍경화는 늘 같았다. 개혁의 기대가 넘치고, 체질 개선의 희망이 샘솟았다. 박근혜 정부는 딴판이었다. 시동을 걸긴 걸었다. 엔진은 달궈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벌써 엔진이 고장난 게 아니냐는 걱정이 터져 나왔다.

 ‘실세’ 경제부총리에 대한 기대가 한껏 커진 건 이런 분위기 때문이다. 시장은 최경환 경제부총리 후보자에게서 선봉장의 위엄을 느끼고 싶어한다. 최 후보자도 동맥경화를 확 뚫는 리더십을 보이겠다는 의지가 충만해 다행이다. 하지만 자신감과 의지가 너무 강하다 보면 실수하기 쉬운 대목이 있다. ‘말의 무게’에 대한 고민이다. 이미 마켓 워처(market watcher)들은 최 후보자의 입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있다. 그가 청문회를 거쳐 정식으로 임명되면 그의 말에 대한 시장의 감시와 해석은 더욱 세밀해질 것이다.

 최 후보자는 벌써 분명한 신호를 보냈다. 화법은 거침이 없다. 문제는 이런 자신감이 내 ‘패’를 드러내는 어리석음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달 경제부총리로 지명됐을 때 그는 “과거 환율정책이 지금 와서는 국민행복과 동떨어지지 않았나 싶다. (고환율은) 기업의 해외 아웃소싱이 늘면서 효과가 별로 없는 듯하다. 국민은 원화가치가 오르면 구매력이 좋아져 소득이 느는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원화가치 상승(환율 하락)을 용인하겠다는 속내를 드러낸 셈이다. 이는 투기세력에는 좋은 먹잇감이 될 수 있다. 공교롭게도 이후 원화 값은 계속 오르고 있다. 물론 경상수지의 꾸준한 흑자로 원화가치 상승세가 불가피하다. 그렇다 해도 말이 한쪽으로 쏠리면 투기 세력이 끼어들 위험은 늘 있는 법이다.

 영국은 1990년대 초 경제 체력이 바닥난 상태였다. 파운드화 값이 떨어지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도 금융산업 경쟁력을 키우겠다며 이렇게 선언했다. “파운드화 가치를 적극 방어하겠다.” 외환보유액을 동원해 시장에서 파운드화를 사겠다는 전략을 내뱉은 것이다. 헤지펀드의 전설인 조지 소로스가 이 제물을 놓칠 리 없었다. 미리 야금야금 파운드화를 사 두었던 그는 시장에 파운드화 폭탄을 투하했다. 영국은 결국 외환보유액만 소모하고, 파운드화 폭락을 막지 못했다. 소로스는 영국의 외환시장을 교란한 뒤 엄청난 수익을 챙겨갔다. 이게 영국의 치욕으로 남아 있는 ‘양털 깎기’ 스토리다.

 시장에 던지는 최 후보자의 말은 모호해야 한다. 그가 의지를 보인 총부채상환비율(DTI)과 주택담보인정비율(LTV) 규제 완화도 필요성은 인정되지만 한 칼에 베기에는 무리다. 그런데도 날이 선 말로 일관한다면 시장의 쏠림과 부작용을 불러오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없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에게 필요한 말은 ‘두루뭉술’이다.

김종윤 중앙SUNDAY 경제산업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