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의 폐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부관참시(부관참시)라는 말이있다. 무딤을 파헤치고 관을 열어, 그 속의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길거리에 내걸던, 끔찍한 형벌.
『간산군일기』를 보면 이런 악형은 말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특히 성품이 포악했던 연산군시절, 금종직·송흠·한명회·정여창·남효일·성현등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극형을 당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제도에 의한 극형이었다. 후세의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서슴없이「악형」으로 흑평하는 것은 바로「죽은 사람에게 칼질하는」, 그 비인간적인 행위때문이다.
요즘 전배우산군낭산의 내산봉·부락에서 일어난 일은 문듞 「부관참시」의 고쟁를 생각하게 한다. 이완용의 묘가 남도아닌 바로 그의 후손(주손)의 손으로 파헤쳐지고, 그 유골은 화장되어 어느 개천에 뿌려졌다고 한다. 넉달만에 밝혀진 이 일은 후일담도 있다.
잿(회)속에 남은 금니5개는 3만원에, 가죽나무 관뚜껑은 또얼마에 팔리게 되었다는 얘기다.
사후 54년. 새삼 이완용의 역사적 죄업을 운위할 흥미는 없다. 이홍직호『국사사전』은 그를 두고 한마디로「구한말의 보국노」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제가 그의 만년에 백작·후작등의 화려한 작위로 보상한 것만으로도 그는「민족의 역적」이라는 굴레를 벗기 어렵다.
그러나 그에 대한 죄업의 굴레가 누구도 아닌 후손의 손으로 씌워지고, 더구나 부관참시까지 당한 것은 국외자의 마음까지 섬뜩하게 만든다. 한국인의, 부통적인 도덕관념이나 예의로는 미처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다.
선조가 아무리 극악무도한 일을 했어도, 그 후손만은 피의 따뜻한 인연을 저버릴수 없다.
인륜은 그래서 무섭고, 그래서 두려운 것이 아닌가. 그것마저 없다면 어디 인간의 세계에 기대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선조와의 관계는 계약도, 관습도 아니다. 그것은 숙명이며, 또한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는천륜의 유대인 것이다.
옛말에『못된 자식은 조상탓 한다』는 속담이 있다. 조상을 탓하는 후손이 얼마나 못나보였으면 이런 말이 생겼겠는가.
이완용의 역사적 오명과 가문으로서의 명협와는 엄연히 구별된다.
민족의 역적이라고 반드시 가문에서 조차 역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완용의 폐묘는 섀삼 세상의 삭막한 일면을 보는 것같아 어딘지 고소를 짓게된다. 우리는 후세들에게 적어도 혈육의 따뜻함과 천륜만은 가르쳐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