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능력이상」이 목표|억척으로 정상에 오르다|「대처」여사, 영국수상이 되기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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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대처」영국수상의 할아버지는 양화공이었고 외할아버지는 철도건널목 간수였다.
다음 대인 아버지는 식료품상 주인이 되었고 어머니는 봉제사였다. 아버지「엘프리드」는 학력이 국졸에 지나지 않지만 굉장한 노력가였다.
「대처」가 태어날 때쯤 그는 읍의회 의원이 되었고 「대처」가 20세 되던 45년 「그랜텀」의 읍장에 당선되었다.
아버지는 항상 어려운 목표를 두 딸에게 주고는 『못하겠다』거나 『너무 어렵다』는 말을 못하도록 엄격히 다스렸다. 그런 교육의 덕분으로 「대처」는 강한 독립심을 키웠다.「대처」는 어릴 때의 가정 형편을 『가난하지도 부유하지도 않은 상태』라고 했지만 집안에 목욕실이나 화장실이 없었고 잠은 식료품 가게의 2층에서 잤으니 그당시 기준으로도 가난한 편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월반한「대처」는 단 한번의 2등을 빼고는 늘 1위였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일에 열중했기 때문에 친구가 별로 없는 외톨이였다.
성인이 된 뒤에도 친한 친구는 두 세명 밖에 없었다.
대학교는 「옥스퍼드」의 「소머빌」여대에 들어갔는데 이 대학 출신 중에는 인도의 전수상 「인디라·간디」여사와 노동당 내각에서 교육상을 지낸 「윌리엄」여사가 있다. 「옥스퍼드」대학학생 보수당 협회회장이 되었지만 사교에는 활발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 동창생은「대처」가 한번 연애편지를 받고 소중히 간직하는 것은 보았지만「데이트 하는걸 보지는 못했다고 술회했다.
「댄스」도 대학에 와서야 배웠지만 흔한「댄스·파티」에 별로 자주 가는 편은 아니었다고.
『행운이 아니예요. 내가 그만큼 노력한 당연한 댓가지요. 』「대처」수상은 이 말을 지금까지 꼭 두 번한 걸로 기록되어있다.
첫번은 9세 때 학교 시낭송 대회에서 상을 탔을 때 선생님이『너 운이 좋구나』라고 칭찬한데 대한 대답이었고 두 번째는 75년 2월 「히드」전수상을 물리치고 보수당의 첫 여성당수로 뽑혔을 때였다.
이 자평은 사실 과장된 것이 아니다.
「대처」는 철저한 노력가여서 바쁠 때는 5시간밖에 자지 앉고 의회에서 가장 식사를 빨리 하는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철야의회 때를 위해 의사당에는 여성의원들을 위한 침실이 3개 있는데「대처」는 그곳을 한번도 이용하지 않은 유일한 여자의원이다.
자신감에서 오는 오만 때문에 심지어 『「대처」는 철저한 능률주의자이기 때문에 아기도 쌍동이를 한꺼번에 낳아 버렸다』는 지독한 야유도 받았다. 「대처」는 이런 야유 말고도 남성세계에서 고군분투해야하는 중압감으로 때론 한밤중에 혼자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고 술회했지만 공석 상에서의 태도는 얄미울 정도로 늠름하다. 「대처」의 정치생애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은 75년 2월의 당수경쟁에 뛰어들어 모든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승리한 것이다.
선거에 패배는 했지만「히드」는 자기가 장악하고 있는 모든 당기구를 동원하여 당수직을 고수하려 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당중진들은 감히 도전하지 못했다.
여기에 「대처」가 뛰어든 것이다.
「히드」의 퇴진을 원하면서도 감히 1차 투표에 나서지 못하는 당의 분위기를 충분히 이용했다. 『「히도」가 물러나지 않으면 위기가 온다』는 내용의 무명의 전문이 보수당의원들 집에 날아들었다. 그리고 「대처」는 침묵을 지키다 표결 3일을 앞두고 「당의 재건」을 구호로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표결 전날 「대처」파 의원들은 의사당 복도를 돌아다니며 「대처」가 1차 투표에서「히드」를 누를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절망적인 엄살을 퍼뜨렸다.
당수직에 눈독을 들이고 있으면서 나서지 못한 모든 경쟁세력들은 1차 투표가 무승부가 되어야 2차 투표에 나설 수 있었다. 그런데 「대처」파는 스스로 절망적이라고 하니「히드」가 1차 투표에서 압도적으로 당선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표를 「대처」에게 몰아줄 수밖에 없었다. 「대처」의 교묘한 「허점 찌르기 작전」이 그래서 성공했다.
【런던=장두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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