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 정리의 새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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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충주에서 5세기말 고구려비의 발견은 뜻하지 않은 성과요 개가다.
지난해 인근 단양에서 진흥왕대 적성비를 찾아냈던 단국대고적조사단이 이에 힘입어 다시 유적지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그 보다 더 오래된 고비를 찾아냈음은 한국 학계의 일대 경사이거니와 그 노고에 경의와 치하를 금할 수가 없다.
그럴수록 이런 막중한 비석들이 어떻게 1천수백년간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한채 버림받고 있었느냐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단양적성비의 경우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기 이전에 이미 산사태로 흙속에 묻혀 세인의 이목을 받을 수 없었다고 가정하더라고 이번 충주 고구려비에 있어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이 비석은 한국이 고촌에선 흔히 보는 동구의 입석이며 그래서 마을사람들이 치성드리는 민속신앙의 대상으로 줄곧 서 있던 돌이라 한다. 더구나 이곳은 삼국시대 이래 조령에서 수안보를 거쳐 장호원·이천을 잇는 지름길에 위치하기 때문에 무수한 발걸음이 이 비석 곁을 지났으리라 믿어진다.
그럼에도 「삼국사기」를 비롯, 조선시대의 방대한「동국여지승관 당」같은데서조차 일체 언급이 없음은 물론 기라 무수한 문집이나 김석문관계 기록에서도 깡그리 빠져 있는 것은 기이하기만 하다. 어떻게 1천5백여년간 그 숱한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칠수 있었을까.
입석(선돌)이란 본시 한국사회에서 신앙적 존재다. 함부로 범접해서는 안되는 신성한 구역안에 그것이 서 있었다. 또 충주비의 경우, 신라강토안에 있어서는 결코 탐탁할 수가 없는 고구려 비석이어서 일부러 외면하는 동안 풍우에 마모되었다고 하자. 그후 모두가 예사 입석이려니 여겨왔다고 하자.
그럼에도 우리가 이번 고구려비의 발견소식을 듣고 커다란 기쁨과 동시에 가슴 뭉클한 충격을 감출 수가 없는 것은 무었때문인가. 우리는 우리 주변에 흩어져 있는 예사로운 것들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 것들인가를 너무도 모르고 살아 왔었다는데 대한 반성이 저절로 솟아나오기 때문이다. 얼핏 보기에는 비록 허술한 것이라 하더라도 하나하나를 정성들여 다시 살피고 가꾼다면 모두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이요, 보배가 될 수 있다는 시사로 받아들여야하리라고 생각한다.
이번 고구려비 발견의 연유를 듣건대 지난해 발족한 예성동호회가 이 예사로운 비석을 주목한데서 발단했다고 한다. 이 동호회는 충주지방 향토문화재를 찾아 가꾸려는「아마추어」동인들이며 그들의 자발적인 활동이 매우 의욕적이었음을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급격한 개발로 말미암아 날로 잃어져가는 향토의 역사와 전통을 바로잡자.』-이것은 예성동호회만의 구호가 아니라 우리나라 어느 고장에서나 바야흐로 절실한 구호다.
오늘의 급성장하는 한국사회의 현실로 보아서는 앞으로 10년뒤 아무리『고향을 찾자』해도 이미 잃어버린 부분이 너무 커서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향토사가 전혀 황무지 상태다. 옛 읍지들은 한결같이 아주 소략한 내용들이며 근래 군지가 발간된 고장조차 20을 넘지 못한다. 향토연구지가 계속 발간되는 고장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해서 관심있는 몇몇 학자가 전국 방방곡곡을「커버」한다는것도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요는 향토문화는 그 고장 인사들이 주변의 예사로운 것들을 재정리하는 자세로 가까운 것부터 더듬어 일깨우지 않는한 올바르게 빛낼 수가 없다. 이웃 일본의 경우만해도 촌락마다있는 공민관이 이와같은 향토사연구와 정리의 중심이 되고 있음을 본받아야할 것이다.
우리도 차제에 문예진흥원이나 전국문화원등을 통하여「전국향토사협의회」같은 지방사료정리연구의 전국적인 확산책을 꾀하기를 제의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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