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獨, 美·英중심 전후처리에 '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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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이라크 전후 복구사업을 둘러싼 국제사회의 갈등이 표면화하고 있다.

개전 이전부터 블록을 형성하면서 맞섰던 미국.영국 진영과 프랑스.독일.러시아 진영이 전후 복구사업을 놓고서도 정면 대결하는 양상이다. 이라크를 둘러싼 두 블록의 갈등은 결국 미국과 유럽의 기존 동맹관계를 근본적으로 재편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막오른 외교전 2라운드=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지난 7~8일 이틀간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에서 정상회담을 열고 이라크 전후처리 문제를 논의했다. 두 정상은 "이라크의 장래는 이라크인들이 결정하며 이라크 복구사업에 유엔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그러나 미 언론들은 "부시 대통령이 언급한 '유엔의 중요한 역할'은 이라크에 대한 인도적 지원사업을 할 수 있다는 제한적 참여의 의미"라면서 "전쟁 당사국인 미국이 이라크의 장래를 주도적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기본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고 분석했다. 부시 대통령은 다음주부터 각국 지도자들과 연쇄회담을 열고 미국의 입장에 대한 지지를 호소할 방침이다.

부시 행정부 내 강경파들도 "아랍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장기 플랜에 따라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에 군정(軍政) 단계부터 미국이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반전 국가들의 대응도 심상치 않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ㆍ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11~12일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3국 정상회담을 한다.

이들은 "전후 복구사업은 미국이 아니라 유엔을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을 정리할 것으로 보인다. 만일 미국이 일방적으로 전후 복구사업을 결정할 경우 이들 국가가 이라크 유전사업 등에서 갖고 있던 기득권이 침해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상당한 마찰이 예상된다.

걱정되는 유엔의 장래=미 중앙정보국(CIA)의 자문기구인 국가정보위원회의 로버트 허친스 위원장은 8일 "프랑스와 독일은 국제사회에서 미국이 더 이상 일방적인 힘의 행사를 하지 못하도록 동맹을 형성하기 시작했다"면서 "이라크전을 둘러싼 갈등은 이 같은 동맹 관계 재편의 시작일 뿐"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중국과 러시아가 이라크전이 시작된 이후 상대적으로 조용한 것은 미.유럽 간 분열을 이용하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국이 유엔 안보리의 지지를 받지 않은 채 이라크전에 돌입했고, 전후 복구사업에서도 유엔의 주도권을 쉽게 인정하지 않을 것으로 보여 앞으로 유엔의 입지는 매우 좁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워싱턴=김종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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