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7)제62화 재일한국거류민단(2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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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조련」붕괴>
조련이 자행한 각가지 폭력행위에 관해서는 여러 번 언급한 바 있거니와, 마침내 여기에 철퇴가 가해졌다.
1949년 9월8일 일본정부는 「우에따」(식전준길) 법상의 고시를 통해 조련과 조련의 청년단체인 민청(재일본조선민주청년동맹)에 대해 해산명령을 내렸다. 여기에는 민단 「미야기껜」(궁성현) 본부와 건청 「시오가마」(염부)지부도 포함되었다. 해산이유는 연합군에 반항하고 폭력주의를 조장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정부는 또 이들 단체의 해산과 함께 조련위원장 윤근과 고문 김천해 등 간부 19명과 민청간부 9명, 그리고 민단과 건청지방간부 8명 등 36명에 대해 공직추방처분을 내리고 해산명령을 받은 4개 단체의 재산을 접수한다고 발표했다.
일본정부의 조치는 전격적인 것이어서 조련과 민단 모두에 큰 충격을 주었으나 일본정부는 그동안 연합군총사령부(GHQ)와 밀접한 협의아래 사전준비를 했었다.
폭력행위의 사례를 꾸준히 수집하고 해산조치에 따른 문제점을 세심하게 검토했다. 조련과 민청만 해산시키지 않고 민단 「미야기껜」본부와 건청 「시오가마」지부를 잡아넣은 것도 공평한 인상을 주려는 배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GHQ측도 조련의 치안교란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참이라 일본정부의 조치를 아무 이의 없이 승인하였다.
조련과 민청이 해산 당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이른바 「시모노세끼」(하관) 소요사건이다. 49년 8월19일 상오 2시쯤 조련과 민청행동대 2백여명이 흉기를 들고 민단 「야마구찌껜」(산구현)본부를 습격하였다. 이들은 사무실을 완전히 때려부순 뒤 시내의 민단간부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집을 부수고 폭행을 가한 뒤 민단간부 9명을 납치했으며 재산까지 약탈했다. 부녀자들에게도 폭행을 서슴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민단원과 그 가족 1백여명이 다치고 4백여만「엔」의 재산피해를 냈으며 조련과 민청행동대 1백31명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민단 「미야기껜」본부와 건청 「시오가마」지부는 민청원 한 사람을 살해한 사건이 빌미가 되어 해산 당했다. 민단 「미야기껜」본부와 「미야기껜」에서 가장 강력했던 건청「시오가마」지부는 약1년 동안에 걸쳐 조련측과 실력항쟁을 벌이던 중 49년 7월14일 민단 「미야기껜」본부단장 박사차가 조련원 배개동을 살해하는 실수를 범했다. 이 사건의 동기는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배가 민단이 붙인 「포스터」를 파기한대 화가 치민 박 단장이 혼을 내준다고 하다가 살인을 하게되었던 것이다.
해산명령이 떨어지자 조련측은 큰 혼란에 빠졌다. 조련은 일본공산당을 철썩같이 믿고있었다.
조련은 제14회 중의원선거에서 일공후보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일공후보가 35명이나 당선되었다. 조련은 일공을 배경으로 마음대로 폭력을 휘둘렀다. 또 폭력행위의 상당부분은 일공의 지도아래 수행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조련과 민청만 해산시키고 일공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점은 조련내부에 심각한 분노를 야기시켰다. 일공에 배반당했다. 일본사람은 어디까지나 일본사람이고 조선사람은 끝내 조선사람이라는 현실적인 자각이 움트게 되었다.
민단의 반응도 착잡한 것이었다. 민단은 「시모노세끼」소요사건이 일어난 뒤 일본당국에 조련과 민청의 해산을 요구했었다. 따라서 사태는 바라던대로 된 셈이었다. 그러나 막상 민단지방본부와 건청지부가 해산되자 반발이 일게 되었다. 더구나 일본정부가 해산명령을 내린 뒤를 이어 계속 강경조치를 발동하면서 격심한 반감이 조성되었다.
49년 10월19일 일본 문부성은 조련산하의 「조선인학교」가 일본의 법령을 무시하고 공산주의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일본 전국의 3백37개교에 대해 폐쇄조치를 단행했다.
또 12월1일 새벽 일본경찰은 관동일원의 조선인부락 81개소를 급습하여 82명의 강도·절도범을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조선사람을 헐뜯기에 급급하던 일본「매스컴」은 일제히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일본인 모두가 조선사람을 때려잡는데 신이 난 판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자 민단은 l2월3일 성명을 발표하고 일본정부의 처사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일본당국이 민족 차별적 탄압을 하고 있으며 조선사람의 피(혈)의 결정인 재산까지 빼앗으려 한다는 요지였다.
내가 보기에 이와 같은 민단집행부의 태도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일본정부의 일련의 조치는 분명 조련과 민청을 겨냥한 것이어서 민단에는 드물게 유리한 국면이 조성된 셈이었다.
나는 민단이 이 기회를 십분 이용해서 일본정부에 대해서는 자숙하는 빛을 보이는 한편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여 대처한다면 민단이 일대 비약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일본정부가 접수한 조련과 민청의 재산도 국민이 물려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실제로 후에 민단은 조련과 민청의 건물 등을 물려받은 일이 있다.
나는 민단집행부의 태도를 소아병적 반일사상에 사로잡힌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일본사람들이 칼을 뽑아들고 기세가 등등한 판인데 무턱대고 들이받기만 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하기야 당시 민단은 이념도 철저하지 못했고 인물·재정 등 모든 것이 빈곤했다. 또 만일 본국정부가 관심을 갖고 동포지도에 나섰다면 민단은 기회를 잃지 앉았을 것이다. 본국은 아무 관심도 없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집행부가 그런 태도를 취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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