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비」의 종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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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이란」은 한반도의 7.4배나 되는 면적을 갖고 있다. 인구는 오히려 우리보다 적은 3천3백60만명.
인구의 구성이 좀 인상적이다. 20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1백명중 60명은 25세이하다. 65세이상의 노인은 4%에 지나지 않는다. 「이란」이라는 국명은 현「팔레비」왕의 아버지.「레자· 샤」 에 의해 채택되었다. 아직도 세계인의 귀엔「페르샤」라는 옛이름이 익다. 기원전 559년 「시루스」대왕이 「페르샤」의 왕으로 즉위한 연대부터 치면 「이란」은 2천5백년의 역사를 갖는 셈이다.
이미 기원전 4세기에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여기까지 발길을 뻗쳤었다. 그후 무려 6백여년동안 「아랍」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한때는 몽고의 습격을 받은 일도 있었다.
현대엔 영국과 「러시아」가 사실상 이나라를 분할통치해왔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영국은 50년동안이나 석유채굴권을 쥐고 있었다. 1951년4월 「모사데크」정권에 의해 영국이 설립한 석유회사는 국유화되었다.
그무렵 「페르샤」의 해방과 독립을 외치던 한 정열적인 군인이 있었다. 「디헤란」의 사막촌에 당나귀를 타고 다니던「래자·한」이란 군인. 그는 끝내「페르샤」군의 부사령관이되어「러시아」 군의 전면철수를 요구하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1925년12월 드디어「왕중왕」(샤·한·샤)의 칭호와 함께「레자· 샤· 팔레비」 는 국왕이 됐다.
2차대전중 「이란」은 다시금 소련과 영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들은 「레자·샤·팔레비」의 퇴위를 요구했다. 그런 위기속에서 22세의 아들「모하메드·레자·팔레비」는 왕위계승권을 받는데 성공했다. 「팔레비」왕의 재위37년이 가능했던것은 미국을 「파트너」로 삼은 외교정책때문이었다. 「이란」은 세계4위의 석유국으로 세계석유매장량의 11%를 갖고있다. 「팔레비」는 「오일·달러」로 근대국가의 건설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토지개혁을 단행. 대지주와 승려들의 적의를 산것이 그의 정치생명에 결정적인 「마이너스」 작용을 했다.
하지만 건설 「붐」속에서 「정치부패」를 방치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큰 실책이었던것 같다.
「이란」에서 「박시시」라는 말은 악명이 높다. 원래는「포시」라는 뜻인데 오늘은「뇌물」이란 뜻으로 통하고 있다. 우편 집배원까지 돈을 주지않으면 편지를 넘겨주지 않는다고 한다. 「로열·패밀리」는 공공연하게 모든 이권에 개입되어 8%의 뇌물을 받고있다.
오늘 「팔레비」 를 밀어낸것은 성난 민중이 아니라, 바로 부패였던것 같다. 「팔레비」화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너무나 어두운 거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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