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이웃 사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떨어져 사는 친척보다 이웃사촌이 가깝다는 옛말이 있다. 궂은 일, 좋은 일 어느 때나 맨 먼저 기뻐해 주고 슬퍼하고 도움을 주는 이는 가까이 사는 이웃이라는 우리 고래의 아름다운 전통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 인심은 날로 각박하고 살벌해지는 것만 같다.
「택시」운전대를 잡고 별별 층의 손님을 모시다보면 이러한 세태가 자주 눈에 띄게 된다.
젊은이가 힘으로 노인을 밀치고 차문고리를 먼저 잡는가하면 응급환자를 빤히 쳐다보면서도 먼저 차를 탔다고 합승을 거절하는 행위는 운전사로서 종종 겪는 불쾌한 일들이다.
14일 수정「아파트」앞에서 있었던 일은 잊을 수 없는 충격이었다. 그 날 하오 5시쯤 나는 서울 여의도 수정「아파트」앞에 손님을 모셔주고 돌아 나오던 참이었다. 때마침 한 피투성이의 어린이를 안은 어머니가 맨발에 새파랗게 질려 차를 세우는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 어머니의 온몸도 어린이에게서 흘러나온 피로 얼룩져 있었고 어린이는 죽은 듯 처져 있었다. 어머니의 주위에는 동네 아낙이며 장정 등 20여명이 둘러서 이 장면을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차의 뒷문을 열며 『좀 도와달라』고 소리쳤다. 어머니도 『누군가 이 애의 몸을 좀 받쳐달라』고 애원했다. 어느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사람은 없었다. 순간 집에 있는 아내와 내 자식들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차에서 뛰어내려 어린이를 받아 「시트」에 뉘었다. 내 온몸도 피투성이였다.
모녀를 싣고 한강 성심병원으로 달리는 동안 그 어머니는 의사도 아닌 나에게 『아저씨, 내 딸을 꼭 살려주세요」라며 울부짖었다. 나중에 차 속에서 「뉴스」를 통해 바로 그 소녀가 「아파트」강도살인사건의 희생자였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새 세상 인심이 이토록 야박해졌는가 싶어 서글퍼졌다. 피묻은 모녀를 둘러싸고 장승처럼 서있던 그 구경꾼들…. 그들도 우리의 이웃이 아닌가. 사람이 진정 사람답게 사는 길, 의협심·애정·상부상조의 윤리는 살기 좋아졌다는 세상만큼 나아진 것 같지 않다. 네집·내집 따지지 않고 드나들며 함께 울고 웃어주던 우리네 이웃 정을 다시 찾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언제 어떤 불행이 누구에게 들이닥칠지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서울 강남구 명일동 명일 「아파트」224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