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9)제61화 극단「신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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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일제말 동경에서 귀국한 이화삼은 그 당시 꽤 활발하던 좌익극단들을 팽개치고 유치진씨가 경영하던 「현대극장」의 「멤버」로 가담했다.
이렇게 태도를 바꾸게 된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일본에서 좌익극단에 이용만 당하고 많은 배신을 당했다는 것이다. 계의 말을 빌면 『빨갱이란 천하의 몹쓸 놈의 집단』이란 것이다.
이는 기회가 있을 매마다 『빨갱이란 배신을 밥 먹듯 하는 놈들』여라며 욕을 했는데, 이것은 그가 일본에서 좌익을 체험해 보았기 때문에 누구보다 더 좌익을 싫어하게 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다.
아무든 그는 멋쟁이 배우였다.
수입없는 가난한 연극인 생활을 하면서도 인생을 어둡게 생각하지 않았다. 적은 것을 얻고도 큰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소박한 예술인이었다.
이화삼과 함께 잊혀지지 않는 또 한사람의 배우가 있다. 여배우 김선영이가 그 주인공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여배우에게 학질을 땐 사람이다.
신파극만을 공연하던 동양극장 전속배우 출신이었는데 나이는 나보다 두살 위였다.
많은 남성들과의 「스캔들」, 그리고 산전수전을 다 겪은 여성이었는데도 제법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던 여배우였다.
키는 작달막하고 전신에 비해 얼굴만이 유독 커보였다. 여성으로서는 매력없는 체격과 얼굴이었는데 어떻게 배우가 되었는지 몰랐다.
신파극 시절 남자배우와 일본으로 도망쳐 한동안 일본생활을 했다. 그녀는 귀국해서 일본에서 연극공부도 하고 성악도 전공했다고 했지만 그것은 거짓말이고 「나이트·클럽」등에서 「댄서」생활을 했었다.
귀국해서 「현대극장」과 황철이 대표였던 「낙랑극회」등을 거쳐 「극협」의 동인이 됐다.
당시만 해도 여배우가 귀했던때라 동인들은 그를 잘 위해주었다.
그때는 지금과 달라 여성이 남성과 어울려 사회활동을 한다는 것은 흔치 않았다. 오직 극단에서만이 스스럼없이 남성과 함께 일할 수 있었다. 그런 사회분위기였는데도 김선영은 남자를 우습게 보았다. 성격이 왈가닥이어서 남자를 그렇게 본 모양인데 한마디로 「난 여자」였다.
심통을 부리면 연극을 할 수가 없으므로 단원들은 그녀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했다. 특히 극단 운영의 책임을 맡은 나로서는 그녀를 다루는데 온 신경을 썼다.
질투·무식·자만심으로 가득찬 여자를 다스리자니 죽을 지경이었다.
배우를 다스리기란 무척 어렵고, 여배우를 다스리기란 더욱 어렵다는 것을 통감했다. 그래서 극단을 훌륭히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능히 국가도 다스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갖기도 했다.
실제로 여배우가 귀했던 시절, 신파극에선 여배우를 휘어잡기 위해 여배우를 아내나 애인으로 삼았다.
이같은 예는 외국도 마찬가지로 「프랑스」출신의 세계적인 극작가 「몰리에르」는 자매배우를 모두 아내로 삼았다.
지금은 여자연기자들도 많이 늘어났지만 극단도 안정되고 질서가 잡혀 이런 고민은 없게 됐다.
이런 고질 투성이인데도 김선영의 연기만은 일품이었다. 그 섬세하고 호소력있는 연기는 관객들을 사로잡았으며 낭랑하고 차가운 것같은 목소리이면서도 따스함이 스며있어 사람들을 열광케 했다.
이런 연기력 때문에 모두 그녀를 멀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를 좋아했던 것이다.
그녀야말로 외모와는 달리 연극만을 위해 태어난 천재적 배우였던 것이다.
1947년 8월에 공연됐던 『은하수』는 해방뒤 최초의 반공극이었다.
38선의 벽은 차차 굳어져갔고 이로 인한 민족의 비극은 이곳저곳에서 빚어졌다.
역시 유치진선생의 작품이었는데 이 연극에 시인 장서언과 평양에서 월남한 최남현이 첫 출연을 해 이채를 띠었다.
연세대 영문과 출신인 장서언은 대학재학중 문단에 「데뷔」했으며 학생연극에도 참여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일제때 여행사의 간부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해방과 함께 직장을 팽개치고 연극을 하겠다고 「극협」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당시 시인이 연기자로 극단에 입단했다는 것은 「뉴스」였다. 그는 장보라란 예명으로 활약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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