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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법보다 판사의 '개인적 소신'이 더 무섭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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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박민제 기자 중앙일보 IT산업부장
김회룡
김회룡 기자 중앙일보 차장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박민제
사회부문 기자

사법연수원 27기인 이형주(44) 전주지법 군산지원 부장판사는 지난해 지방법원 부장판사가 된 중견 법관이다. 동료들 사이에서 “열심히 연구하는 판사” “사회현상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동료”라는 평과 함께 “개인적 소신과 고집이 강한 판사”라는 평도 듣고 있다.

 그가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지난해 2월 서울중앙지법 형사1단독에 근무할 때였다. 당시 불법 스포츠 도박사이트를 개설해 30억원을 챙긴 혐의로 기소된 최모(35)씨 사건에서 그가 작성한 판결문이 공개되면서였다. 최씨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면서 이 부장판사는 “(카지노를 운영하는 등) 거악(巨惡)을 범하고 있는 국가가 피고인을 중죄로 단죄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소신을 밝혔다. 이 판결은 개인적 소신에 따라 법과 원칙을 허문 ‘원님 재판’의 대표적 사례로 지적됐다.

 1년4개월여가 지나 이 부장판사가 다시 논란의 진원지가 됐다. 해운조합 직원 윤모씨 등 2명의 구속영장을 지난 30일 기각하면서다. 윤씨 등은 세월호 침몰사고에 대한 검찰 수사 과정에서 격포~위도를 다니는 선박들의 출항 전 안전보고서를 허위로 작성한 혐의를 받고 있다. 문제는 이 부장판사가 기각 사유서라는 공적 문서에서 개인적 소신을 밝힌 대목이다. 그는 사유서에서 “대형 해양사고는 국가의 전반적인 격이 올라가지 않는 한 방지할 수 없다. 위법행위를 엄벌에 처하는 것은 거시적인 본질에 대한 인식을 흐리게 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법조계 안팎에선 궤변이라는 반응이 많았다.

 세월호 참사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담당 공무원과 산하기관 직원들이 유착해 감독업무를 소홀히 한 것이다. 사고 원인을 철저히 파헤쳐 책임자 및 관련자들을 엄벌에 처해야 하는 건 당연지사다. 이를 ‘본질을 흐리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또 국격이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모든 국민이 자기 자리에서 맡은 업무를 제대로 수행할 때 상승한다는 것도 상식에 속한다. 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앞으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당사자들은 법이 정한 구속영장 발부요건인 ‘도주 및 증거인멸 우려’ 외에 담당 판사의 ‘개인적 소신’이 뭔지도 신경 써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최근 국민의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예전만 못하다. 김일성 시신을 참배한 행위에 대해 ‘동방예의지국이라서 괜찮다’는 판결이나 서울시내 도로 4차로를 점거한 행위에 대해 ‘불편을 끼친 게 없다’며 무죄를 선고한 판결이 잇따라 나온 것도 한 원인이다. 사회현상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법관이 많은 건 바람직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만의 ‘연구 결과’를 섣부르게 현실에 대입, 비상식적 판결이 이어진다면 신뢰 회복은 요원하다.

박민제 사회부문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