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수, 新중년의 이 몹쓸 사랑!] 누구를 위해 사는가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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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남자든 여자든. 하지는 않는데 이성 간의 만남은 번잡하고 부산하게 많다. 어느 정도냐 하면 애청하는 라디오 음악프로그램 게시판 단골끼리 이루어진 오프라인 모임조차 열심히 출석한다. 누구누구가 그렇고 그렇다더라, 소문이 무성해도 언제나 꿋꿋하다. 여럿이도 단둘이도 만남은 끊임이 없건만 아무런 일도 벌이지 않는다. 그런 그, 그녀를 두고 사람들은 칭송한다. 참 점잖다. ‘그녀는 정숙해’라고. 아무런 문제도 없다. 그럼 만사 오케이?

‘그녀는 정숙해’ 그럼 만사 오케이?

하지 않는, 정확히 말해 특정인과 사귀지 않고 부산한 만남만 이어가려 하는 마음 속에 두려움이 있다. 그 두려움의 원천이 되는 여러 갈래 속에 어린 시절이 있다. 착한 아이, 어른 말 잘 듣는 아이, 칭찬받는 것에 길들여진 아이. 착한 아이는 이성과 사귀는 일을 추한 스캔들로 배웠다. 물론 섹스는 죄악으로 인식한다.

칭찬받는 일에 익숙한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비난이다. 혹시라도 비난 받는 일이 생길까 그, 그녀는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 전혀 주목 받고 있는 상황이 아니어도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남의 시선 속에 있다. ‘남들이 뭐랄까 봐’ 언제나 남의 말을 하는 것이 사람들 속성이지만 실제로는 타인의 일에 그리 관심이 없는 법. 그런데도 언제나 남들이 뭐랄까 염려한다.

정리해 보자. 하지 않고 사귀지 않고 들입다 만나기만 하는 사람들은 비난을 두려워하고 언제나 남의 시선을 의식한다. 정리해 보니 그것도 괜찮은 삶의 방식이다. 무슨 탓을 하겠는가. 그렇게 조심조심 살고 싶다는데. 그런데 아뿔싸,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사람들 욕망의 크기가 대체로 동일하다는 점이다. 하지 않는 사람도 실은 하고 싶다는 간절함은 똑같이 품고 산다.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뒷말이 무성한 커플들에 대해 남모를 부러움을 품고도 있다. 이 애틋한 마음을 어이하랴!

어쩌면 가장 많은 수의 중년들이 그처럼 애틋한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만의 연인을 그리워하고, 멀찍이 떼어 놓은 몸의 욕망에 대해 바닥 모를 갈망을 느끼고.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고 스스로 다독이고. 밤바다! 혹은 마스터베이션. 젊은 날 친구들과 시끌벅적 어울려 바닷가에 놀러 간 기억이 있다. 바다의 밤은 무섭도록 캄캄한데 어쩌다 홀로 방파제에 나왔다. 사위의 칠흑 같은 어둠과 망망한 파도소리가 오직 나 한 사람만을 위한 배경인 것 같다.

친구들은 그리 멀지 않은 민박집에서 목청 높여 기타치고 노래하는데 왠지 쓸쓸한 기분이다.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는 물살을 오래 응시하다가 문득 놀란다.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진 자신의 손동작 때문이다. 그는 일종의 자위행위를 하고 있었다. 가슴 가득히 원인 모를 고독감에 차 있는데 손은 발기된 아래를 주무르고 있다. 피식 웃음이 나오려 한다. 에라 모르겠다, 손에 가속도를 붙여 해결할까. 아니 조용히 참고 넘어가야지. 망망한 밤바다와 마스터베이션. 그것은 사람의 풍경이다.

젊은 날의 그녀는 친구들과 어울려 설악산에 놀러 갔다. 권금산장 방향으로 숱하게 늘어선 숙소의 한방에서 친구들은 게임을 하고 있다. 음료수를 들고 바깥으로 혼자 나왔다. 밤하늘의 별들을 헤어보고 싶었을까. 건물 주위를 빙글빙글 돌듯이 산책을 하고 있는데 어떤 기척이 있다.

함께 온 친구와 낯 모를 남자였다. 그들은 키스를 하다가 황급히 몸을 숨기는 상황이었다. 짐작이 간다. 저녁 무렵 도착했을 때 시답잖게 말을 걸던 다른 숙소 남자애들 가운데 하나였다. 귀신같기도 하여라. 어느 결에 말을 섞고 만날 약속을 하고 게다가 키스라니!

재빨리 등을 돌려 반대방향으로 향하면서 그녀는 속으로 외친다. 나는 저러지 않을 거야. 나한테 절대 저런 일은 없을 거야. 밤하늘의 별은 총총했는데 그녀에게는 먼저 엄마와 언니가 떠올랐고 세상이 무서웠다. 낯선 남자와 대뜸 키스를 나누는 영미가 불결하고 천해 보였다. 그렇게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도 그녀는 잠깐 스쳐가는 생각을 어쩌지 못했다. 저게 꼭 잘못된 일일까. 나는 왜 절대로 저럴 수 없다고 생각할까. 혼란에 빠져 부지런히 앞으로 걷고만 있는 그녀. 그것은 사람의 풍경이다.

착한 여자 콤플렉스, 좋은 사람 콤플렉스에 대해 많은 말이 있다. 뭉뚱그려 말하면 일종의 강박증 같은 것이다. 성경은 자손을 번성하라 가르치면서 동시에 간음에 대한 경고로 욕망을 옥죈다. 교회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사람조차 그 같은 기독교 윤리에 지배 받는다. 불경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모든 욕망은 헛되고 무상한 것이며 욕망의 추구는 탐욕의 십악대죄로 인식된다.

종교적 계율이 아니라 아예 가정·학교·사회의 가르침 전부가 참하고 좋은 사람 콤플렉스를 유발하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몸의 욕망을 극복의 대상으로 설정한다. 그것은 일종의 사회안전망이고 기성질서 유지책의 일환이다. 그러니 하지 않고 사귀지 않아 이른바 ‘좋은 사람’ 노릇을 하고 있는 사람의 안타까운 타협책이 바로 번다한 만남에 열중하는 일이다. 이성이 있는 곳에 열심히 나타난다. 부인할 수 없는 몸의 욕망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 사귀지 않고 하지도 않는다. 왜? 두려우니까.

타인의 시선에 갇혀 사는 건 미성숙의 징표

남의 시선이 두려워 아무런 일도 벌이지 않고 사는 것이 안전한 삶의 방식인 것은 틀림없다. 그, 그녀는 무탈할 것이다. 좋은 사람 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당신은 혹시 나이가 들어서도 영원히 자라지 않는 미성숙한 사람을 본 일이 있는가? 언제나 남의 뒷소문에만 열중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는가? 아무도 모르게 야동·야설에 열중하는 숨은 포르노 매니아를 알고 있는가? 이성에 대해 특별한 이유 없이 적의에 가득 찬 관점을 피력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는가? 아주 우아하게 일그러진 영혼을 목격한 적은 없는가?

욕망의 무차별적인 발현을 칭송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욕망의 과도한 억제가 과도하게 칭송 받는 점을 지적하는 말을 별로 듣지 못했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점잖은 처신의 뒤안길에서 행해지는 괴이한 행태도 실은 매우 많다. 욕망의 과도한 발현도, 과도한 억제도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다.

끊임없이 이성이 있는 장소를 찾아 다니면서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아 칭송 받는 것이야말로 부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타인의 시선에 갇혀 사는 것은 미성숙의 징표다. 언제나 착하고 좋은 사람 소리 듣고 싶어하는 것도 변형된 욕망의 하나다. 그런 억압이 일그러진 자아를 낳는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 사는 걸까.

김갑수 시인ㆍ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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