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세상읽기

북한 무너지면 유엔 평화유지군이 대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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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일러스트=강일구]
남정호
국제선임기자

2000년대 초 대북 퍼주기 논란이 불거지자 외교부 일각에선 다소 엉뚱하면서도 기발한 묘안이 나왔다. 북한군에게 유엔군 상징인 푸른 헬멧을 씌워 평화유지군으로 활용하자는 아이디어였다.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뛰면 1인당 1200달러 정도가 파병국에 주어진다. 선진국엔 푼돈이겠지만 빈국 기준으론 거액이다. 파키스탄·방글라데시·인도가 최대 파병국인 것도 이런 경제적 배경과 무관치 않다.

 군사력 하나만은 국제적 경쟁력을 갖춘 북한이다. 혹독하게 단련된 북한군이라면 아프리카 같은 험지에서도 활약하고 남을 게 분명했다. 군기도 세서 일부 아프리카 군대처럼 강간·횡령 같은 사고를 낼 위험도 훨씬 덜할 것이다. 성사만 된다면 북한으로선 매력적인 외화벌이 방안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평화의 사도’란 이미지까지 덤으로 챙길 수도 있었다.

  한국으로서도 썩 괜찮은 카드였다. 우선 북한이 외국에서 돈을 벌면 대북 경제지원을 줄일 수 있었다. 퍼주기 논란에서 벗어날 수 있단 뜻이다. 또 유엔 평화유지군을 파병하려면 인권침해 논란이 없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충분하진 않겠지만 북한 내 인권상황 개선의 계기로도 삼을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방안은 2006년 물거품이 된다. 김정일 정권의 느닷없는 1차 핵실험 탓이었다.

 이렇게 테이블에 제대로 올려놓지도 못한 채 사라진 북한 유엔평화유지군 아이디어였지만 요즘 들어 다시 들여다볼 때가 된 듯하다. 다만 이번엔 북한군을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보내는 게 아니다. 북한으로 평화유지군을 파병하자는 거다. 이 아이디어가 중요해진 건 지난해 말 장성택 숙청 이후부터 부쩍 높아진 북한의 급변사태 가능성 때문이다.

 전혀 새로울 게 없는 이야기지만 북한 김정은 정권이 졸지에 무너질 가능성은 늘 존재한다. 이럴 경우 북한 내에 중심세력이 사라져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올 공산이 크다. 이와 관련해 온갖 시나리오가 난무하지만 중국이 가만있지 않을 거란 대목에선 큰 이견이 없다. 북한 급변사태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을 나라가 중국인 까닭이다. 급변사태 시 수백만 명에 이르는 난민이 발생할 게 뻔하고 이 중 대다수가 압록강·두만강을 넘어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갈 공산이 크다. 중국으로선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다.

 자연히 이런 사태를 대비한 듯한 중국 측 움직임이 계속 포착되고 있다. 이달 초엔 유사시 북한 출동의 임무를 맡은 중국 인민해방군 선양군구가 북·중 접경지역에서 대대적인 군사훈련을 했다. 이 중에는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놓는 훈련도 포함돼 있었다. 지난 1월에도 같은 선양군단 소속 병사 10만 명이 참가한 동계훈련이 백두산에서 열렸다. 북한에서 소요가 일어나면 당장 밀고 들어갈 기세다.

  중국의 대외적 입장은 급변사태가 나도 일방적으로 진주하진 않겠다는 것이다. 중국 관영매체인 인민일보도 최근 “북한 급변사태 시 중국은 러시아가 크림반도에 한 것처럼 개입하진 않겠다”고 전한 바 있다. 그러나 여기엔 꼬리표가 붙어 있다. “북한에서 대량 난민이 밀려와 중국의 안전이 위협당하거나 안보를 위협하는 경우는 제외한다”는 단서다. 뒤집어 보면 대량 난민이 발생하면 들어가겠단 뜻이다.

 지난 13일엔 워싱턴에서도 급변사태 이야기가 나왔다. 미국 6자회담 수석대표인 글린 데이비스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중국 정부와 북한 급변사태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고 시인한 것이다.

 이처럼 주변 강국들이 북한 급변사태를 염두에 두고 부지런히 움직이는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중국이 북한을 접수하는 걸 손 놓고 보고만 있어야 하나.

 이에 대한 대안으로 생각해볼 만한 게 유엔 평화유지군을 꾸려 휴전선 이북으로 들여보내자는 거다. 가급적 한국 주도로.

 따지고 보면 한국만큼 유엔과 관련이 깊은 나라도 드물다. 사상 처음으로 유엔군이 파병된 것도 1950년 한국전쟁 때였다. 엄밀히 따지면 한반도는 여전히 유엔사령부 관할하의 휴전상태다. 게다가 유엔의 최고 수장이 한국이 낳은 반기문 사무총장 아닌가. 일방적으로 한국 편을 들 수는 없겠지만 누구보다 열의를 갖고 이 문제를 대할 게 틀림없다.

 어물어물하다간 북한 급변사태로 생겨날 소중한 통일 기회를 허무하게 날릴 수 있다. 설사 김정은 정권이 쓰러져도 북한의 잔존세력이 한국군이나 미군의 진주를 쉽게 허용할 리 없다. 중국이 밀고 들어가 친중 정권이 탄생하면 한국과의 통합이 무산될 위험이 있다. 결국 현실적 대안은 유엔군 또는 다국적군이 들어가 사태를 장악하는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를 염두에 둔다면 한국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 지금부터라도 유엔 평화유지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거다. 그래야 북한 평화유지군이 꾸려지더라도 앞장설 명분이 생긴다. 걱정되는 건 평화유지활동에 대한 한국 기여도가 반 총장이 한탄할 수준이란 점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전 세계에 파병된 한국군은 618명. 세계 35위다.

 우리는 유엔 평화유지군 파병이 그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길게 보면 적극적인 유엔 평화유지군 참여가 한반도 통일을 향한 지름길인 셈이다.

남정호 국제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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