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내가 만난 세계의 지도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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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브레즈네프>
내가 만난 외국지도자 중 가장 상대하기 힘든 인물은「브레즈네프」공산당 서기장이었다. 72년5월 처음「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협상이 순조로와 분위기는 농담도 오가는 등 상당히 부드러웠다.
그러나 이야기가 월남전에 이르자 그의 태도가 돌변했다. 나는 일순간 이 사람이 선과 악의 두 얼굴을 가진「지킬」박사와「하이드」씨가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내 등허리를 얼싸안고 농담을 하던 그의 목소리마저 화난 목소리로 바뀌어 버렸다.
위압적인 목소리, 사람을 끄는 매력, 궁지에 빠지면 교묘하게 돌아가는 눈동자에「제스처」를 섞어가며 쏘아대는 컬컬한 말투로 보아 그는 소련의 제l인자로 될만한 역량은 충분했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보스」기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표정 드러내지 않아|코시긴·포드고르니>
수상「코시긴」은 표정마저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냉정한 인물로 바로 공산주의 사회의 귀족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실각한「포드고르니」최고회의 간부회의의장은 미 중서부 출신 상원의원과 같은「타입」의 인물이었다. 세 사람 모두 대단한 멋쟁이였다. 「브레즈네프」는 최신유행 양복을 즐겨 입었고 모두가「셔츠」에「커프스·보튼」을 달고 있었다.

<모택동>
중공지도자들은 일반적으로 미국에서는 볼 수 없을 만큼 특이한 개성을 갖고 있는 점이 두드러졌다. 특히 모택동과 만난 시간이 짧았던 것은 참으로 서운했다.
모는 특히 지적인 면에서 날카로운 풍모를 갖고 있어 외경스러운 존재 같아 보였다.

<주은내>
수상 주은내는 재기가 넘쳐흐르고 모든 행동이 세련되어 있었다. 여러 차례 회담에서 그는 외유내강형의 인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최근의 세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존재였다. 그만큼 흉중이 깊고 정력적인 인물은 역사가 짧은 미국 같은 데서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76년 개인자격으로 다시 중공을 방문했을 때 그가 사망하고 없었던 것은 참으로 서운했다.

<드골>
69년3월「프랑스」의「오를리」공항에 도착했을 때 창 밖으로「드골」대통령이「코트」도 입지 않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기온이 영하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나도 얼른「코트」를 벗었다. 그는 전례 없이 영어로 인사말을 건넸다. 그는 솔직하고 소박한 거인이었다.
「드골」의 부인은 훌륭한 성품과 강인한 풍모를 갖고 있었다. 부인의 관심은 남편과 가족에 대한 것뿐이었다. 『대통령은 일시적이고 가정은 영원한 것입니다.』 「드골」부인의 말이었다.
그와 만난지 두 달도 지나지 않아 69년 그는 대통령직을 사임했을 때 나는 이제 세계에는 2류의 지도자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키신저>
「키신저」는 초인적 일을 치러낸 정력적인 인물이다. 사임할 때도 나는 후임「포드」대통령에게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만은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라고 이야기했다.
월남평화협정이 엎치락뒤치락 그의 사임 소문이 나돌 때도『그는 사임하겠다는 생각이 있어도 그것을 잊어버릴 만큼 일에 열중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74년 중동방문 도중에 있었던「키신저」의 사임 소동도『공포』였다.

<위기 벗어나는 과단성|아이젠하워>
「드와이트·아이젠하워」대통령은 따스한 미소와 냉정한 푸른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품을 기억하겠지만 나는 그의 과단성 있는 지도력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는 위기가 닥칠 때나 중대한 문제를 다루어야 할 때면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아이젠하워」는 자신에 대한 비판은 잘 용납하지 않았다. 52년 선거운동 때「트루먼」대통령이 정치경력이 없다는 점을 꼬집어『그 사람이 정치를 모르는 건 돼지가 일요일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 일 것』이라고 한말을 끝내 잊지 못했다.

<국내정치의 강적|존슨>
「존슨」대통령은 아주 유능하고 자부심이 강한 남자였다. 그는 위대한 대통령이 되고자 안간힘을 썼다. 그는 전임대통령을 훨씬 능가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불운한 대통령이었다. 안정된 시기였다면 그는 틀림없이 위대한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국내외의 시련은 그에게 너무 벅찬 것이었다.

<케네디 형제>
국내정치에서 가장 힘든 상대는 불출마를 선언한 인물「테디·케네디」였다. 「케네디」에게 있어 대통령후보로 나서지 않겠다는 것이 최선의 전략이었을 것이다. 하기야 1969년7월「채패퀴딕」의「파티」후에 그의 승용차가 다리에서 떨어져 동승했던 젊은 여자가 익사하고 나서는 별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많은 의혹이 있는 이 사고에 만약「케네디」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이 관련되었다면 매체와 대중은 그로 하여금 공직생활을 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문에 싸인 이 사건을 알고싶어 나는「존·엘리크먼」에게 진상을 조사하도록 말했으나「루머」이외에는 소득이 없었다.
「로버트·케네디」는 연방수사국(FBI) 국장인「에드거·후버」의 법무성 안의 영향력 때문에 장관으로서 야심적인 계획을 추진하는데 애를 먹었다. 두 사람은 아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에드거·후버」는 대통령의 동생이자 자기의 상사이기도 한「보비·케네디」를 가리켜『비열한 꼬맹이 ×자식』이라고 불렀다.

<험프리>
「험프리」를 늘 생각하면 1972년 대통령 지명전에서 패배하여「맥거번」의 지명수락연설을 듣던 때의 표정이 연상된다. 그는 존경할만하고 지략이 풍부한「라이벌」이었다. 그는 애국심이나 감정, 자신의 약점을 내보이는데도 서슴지 않았다.
1976년 선거 때 그가 대통령 후보지명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다시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1968년 선거에서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다면 기회가 다시없었을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시대도 지나가 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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