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문도 긴장24시…심리전 한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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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금문도(자유중국)=이용석·이수근 기자】「타이베이」에서 2차 대전 때의 주력 수송기의 하나였던 C-82기(일명 사다리비행기)를 타고 2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금문도는 의외로 고요하고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그러나 겨우 2천3백여m 건너편에 있는 중공군을 대적해서 섬 전체가 완전 요새화 되어있다. 다만 군사시설이 돋보이지 않고 푸른 숲으로 뒤덮인 자그마한 구릉과 그 사이사이로 잘 포장된 깨끗한 도로 등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자유중국과 중공이 서로가 「하나의 중국」이라는 실체에 묶여있다는 것을 이틀에 한번씩 주고받는 2시간씩의 포격 전으로 상대방에 확인시켜주는 접점이 금문도.
금문 지역 국부군부 사령관 유장군은 『이틀에 한차례씩 포격전이 계속되어 오지만 협정 같은 것을 맺어서 하는 것은 아니고 저절로 그런 관행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포격을 하더라도 서로가 민가나 시설물을 피해 공터에 포격하기 때문에 서로가 조금도 피해를 보지 않는다』고 상징적인 전쟁을 설명했다. 활처럼 휘어진 해안선 북단에 자리잡은 마산초소에서 2천3백m 떨어진 중공령 각 서도가 흐릿한 날씨에도 손에 잡힐 듯하고 그 섬 안쪽 내해에는 중공의 돛단배 수 척이 한가롭게 고기를 잡고있다.
망원경을 통해 본 중공령 저쪽 어디에도 「토치카」하나 눈 안에 잡히는 것이 없다.
안내 장교는 『중공은 모든 군사시설을 완전히 지하에 두고 있다. 우리도 80%이상을 지하에 설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해발 3백여m의 「페이타이우」산은 그야말로 거미줄같이 「터널」로 사통팔달 해있고 그 산 속에는 1천여명을 수용하는 대극장도 있었다.
유장군은 『국부군이 대륙으로부터 이 섬으로 밀려나왔을 때 병사들은 자기들을 적으로부터 은폐하기 위해 어두움이 깔리기만 하면 매일 참호를 파는 것이 중요일과였다』고 감회 어린 듯 회상했다.
『지금은 섬 전체가 푸른 숲으로 뒤덮였지만. 20여년 전만 해도 이 섬은 완전히 불모의 땅이었다』고 설명한 유장군은『그동안 8억4천만그루의 나무를 심었다』고 했다. 유장군은 방문한 기자단을 한 중대연병장으로 안내했다.
빨간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 때마침 북서풍이 불자 막 대형기구들을 본토로 띄워보내고 있었다. 그 속에는 장경국씨 총통선출기사가 실린 대만 중앙일보와 선전책자, 「비스킷」등의 구호 등, 혹은 「트랜지스터·라디오」등이 들어있었다.
한 병사는 『기구 중 큰 것은 멀리는 신강성 및 「티베트」까지 날아간다』고 설명했다.
중공은 연을 이용해서 전단을 뿌리고있다. 열전은 가시고 심리전이 나날이 열기를 더하고 있었다.
금문도는 대만에서 2백40km 떨어진 5개 부속 도서를 거느린 강화도 반 만한 크기의 섬. 그러나 행정상으로는 아직도 본토의 본건성에 그대로 두고 있다.
주민은 5만7천5백여명. 그중 초·중·고등학생이 2만5백여명이나 된다. 금년에 처음으로 벼를 시험재배하기로 되어있다는 금문도의 특산품은 고량주와 도자기 제품.
기자들을 안내했던 국방부 정훈국의 한 장군은 『금문도는 대만방위의 방파제이자 본토 수복의 전초 기지이며 대만해협에서 중공해군의 진출을 봉쇄하는 요새 역할을 하기 때문에 금문도의 확보는 정치·군사적인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장군은 또『본토민중들에 대한 자유세계의 소식을 전하는 최첨단기지가 금문도』라면서 『우리가 이 섬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본토민중들에 대한 심리전에서 큰 타격을 보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중공은 금문도의 이같은 중요성을 인식, 49년 이후 6차례의 대규모 공격을 통해 이 섬을 탈취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중공군의 공격 중 가장 치열했던 것은 58년의 금문도 위기. 이때 우리 나라의 최병우 기자가 이 위기를 취재하다 실종됐던 해역이 바로 금문 언저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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