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면 볼수록 종잡을 수 없는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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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실험적인 소설경향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아온 소설가 정영문(38)씨가 네번째 소설집 '꿈'(민음사)을 펴냈다. 2001년부터 2002년까지 1년여에 걸쳐 문예지들에 발표해온 중단편 7편을 모은 것이다.

정씨 작품의 독특함은 이번 소설집에서도 여전하다.

첫 소설 '물오리 사냥'은 특별한 줄거리가 없는 밋밋한 작품이다. 경찰인지, 사설탐정인지 신분이 분명치 않은 추적자 '나'와 P가 실종자를 찾다가 본인이 실종된, 2차 실종자를 찾아 나서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실종자의 행방에 대한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한 가운데 추적자들은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할 만한 인물을 기다리지만 그는 며칠째 부재 중이다.

할 일이 없어진 둘은 강가로 나가 물오리 사냥을 하거나 낚시를 한다. 갑자기 등장한 어린 K가 추적자들과 어울리는데, K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악어' 또는 '아어' '가재' 뿐이다.

낚시나 하고 물오리를 사냥하는 추적자들이 사건을 해결할 리 만무하다. 실종자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전망. 확신이 없는 가운데 어느 순간 '내'가 아어, 가재를 입밖으로 내뱉는 말더듬을 경험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마치 새뮤얼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의미없는 대화를 연상시키는 소설의 세계는 가능한 한 서사가 배제되고 서술이 주가 된 무미건조한 세계다.

서사를 대신해 소설을 채우는 것은 오리 사냥의 최적기에 대한 나와 P의 입씨름, 흥미진진하지 않은 과거의 산토끼 사냥 경험, 나와 P사이의 신경전 같은 너절한 것들이다.

정씨 소설의 문체도 특이하다. 추적자들 사이에 대화가 자주 등장하는데, 정씨는 겹따옴표("")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자네, 산타클로스의 유래에 대해 아나, 한참 동안의 침묵을 깨며 내가 말했다. 몰라, P가 말했다'같은 식이다.

의문문임에도 의문부호(?)를 자주 생략하다보니 '토끼들은 어떻게 했어, P가 말했다'같은 문장은 뒷문장을 읽기 전에는 언뜻 의문문으로 보이지 않는다.

문장부호들을 생략, 불투명 필터를 거친 것처럼 생기 없는 대화들 때문에 등장인물들은 현실에 개입해 행동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무기력한 존재로 보인다.

서사를 이끌어 나가는 적극적인 성격의 주인공을 대신해 소설이 독자를 붙들어매는 힘은 등장인물들의 냉소적인 대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주인공들의 극단적인 행동에서 나온다.

두번째 소설 '파괴적인 충동'의 주인공은 식물인간 아버지의 숨을 지탱해주는 호흡기를 떼어줄 것을, 마치 분식점에서 라면을 주문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변덕스럽고 갑작스럽게 요구하고, 자신에게 '삥을 뜯어간' 10대 한 명을 따라가 돌로 머리를 내리쳐 기절시키는 패륜아다.

정씨가 1996년 문단 데뷔 이후 줄곧 같은 경향의 소설 실험을 계속해온 이유는 무엇일까.

정씨는 "곳곳이 균열돼 있고 틈이 많아 서서히 절망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현실, 단정적으로 '이거다'라고 얘기할 수 없는 이해 불가능한 현실에서 내 소설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판단과 행동의 근거를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소설 속 주인공들은 도덕.책임.타인의 시선 등에서 벗어나 일탈로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정씨는 "종잡을 수 없는 현실에 비해 죽음.절멸같은 단어는 오히려 확실한, 절대적인 세계"라고 말했다. 때문에 '파괴적인 충동'의 주인공은 아버지의 죽음을 아무런 가책 없이 요청했다.

기괴하고 낯선 정씨의 소설은 초현실주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정씨는 "초현실주의 그림이나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영화 등에서 소설 속 장면을 따오기도 한다"고 밝혔다.

최근 모 일간지 설문에서 작가들이 꼽은 가장 실험적인 작가로 뽑혔던 정씨는 "요즘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의미있는 작품을 생산하려는 작가적 고민 탓이 크다. 그 무거운 책임감은 정씨로 하여금 "놀면서 돈버는 직업 없나"하는 비명을 절로 지르게 하고 있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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