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의 떼죽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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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꺼진 얼음 밑으로 가라앉은 어린이들을 살려내겠다고 어머니가 쫓아 들어가 죽고, 그 뒤를 이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따라 들어가 죽고,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버지가 시체들이라도 건져야겠다고 얼음 속에 뛰어들고….
어리석다고만 보기에는 너무나도 애처로운 한 가족의 비극이다. 사람들은 남의 불행을 동정해줄 만큼은 인자스럽다. 그러나 그 이상은 되지 못한다.
이런 참변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목격자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구경꾼으로 끝났다.
일가 3대 5명을 삼킨 곳에는 2.5m 두께의 얼음이 얼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살얼음판 위에서 어린이들을 놀게 한 것부터가 잘못이기는 하다. 물론 4m나 눈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니까 살얼음판인 줄도 몰랐을 것이다
죽은 어머니는 자기가 서 있는 얼음이 꺼지는 줄 모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본능은 아들을 삼킨 구멍 속으로 달려들게 만들었음이 분명했다. 이런게 모정이다.
할아버지·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귀여운 손자와 며느리가 물에 빠진 줄 알고 있으면서도 안전한 둑 위에 서서 발만 동동 굴리고 있을 수만도 없었을 것이다. 무의식중에 살얼음판 위를 달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게 혈육의 애틋한 정이자 본능이라고 할까.
그것은「이솝」의 우화에 나오는 양 두목을 따라 물에 빠져죽는 양떼의 어리석음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짐승의 본능 중에서 가장 강한 것은 생존에의 본능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강한 것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부정이자 모정인가 보다.
이게 눈을 어둡게 만든 것이다. 어리석음이 판단을 그르쳐 놓는 것은 아니다.
차분한 상황 아래서였다면 얼음이 꺼진 곳의 수심이 5m나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얼음의 표면에 작용하는 팽창력으로 하여 구멍이 난 다음에는 얼음이 지탱할 수 있는 중량이 훨씬 적어진다는 것을 알만도 했다.
그러나 어린이의 부모나 조부모에게는 그런 판단의 여유가 있을 수 없었다. 있었다면 마을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결국 아무리 인정이 바뀌고 사회가 달라져도 믿을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혈육으로 뭉친 가족뿐인가 보다. 이것만은 바꿔지지 않는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바뀔 수 없는 유대이기도 하다. 특히 살얼음판과도 같은 인정의 세상에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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