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조5천억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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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새해 예산 3조5천1백70억원이 확정되었다. 「인플레」시대라고는 하지만 「조」에 대한 감각은 아직 실감이 되지 않는다. 우리 나라 예산에 「조」 단위가 등장한 것은 작년부터였다.
「조」의 한자어 뜻은 「많다」「조짐」「백성」 등 갖가지다. 어원은 거북의 등 (갑)이 갈라진 모양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하필 그것이 왜 숫자의 단위인 조가 되었는지는 끝내 궁금한 일이다.
「조」는 억의 1만 배에 달하는 크기다. 3조5천억원이면 1천원권으로 35억장이나 된다. 이것을 한 줄로 이어 놓으면 지구를 14바퀴는 돌 수 있다. 35억장의 천원권을 쌓아올리면 「에베레스트」산의 40배 높이나 된다. 시정인의 감각으로 그만한 액수의 돈은 사뭇 환상적인 느낌마저 든다.
자유당 정권의 말기인 1960년도의 예산에 비하면 거의 72배나 불어난 규모다. 민주당 정권의 예산도 고작 78년도의 60분의 1에 불과했다. 10년 전에 비하면 12.7배.
일본의 지난해 예산은 우리의 약 14배 정도였다. 세계 최강국을 구가하는 미국의 예산에 비하면 우리는 그 40분의 1이다.
이쯤 되면 3조5천억원의 규모를 어림으로나마 느낄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러나 한결 더 실감할 수 있는 수치가 있다. 국민 1인당 조세 부담액은 약 9만8천원 쯤이다. 새해엔 5인 가족을 거느린 가장은 어쨌든 49만원 상당의 각종 세금을 직접·간접으로 부담해야 한다.
나라의 살림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에게 돌아오는 세부담도 그만큼 커지는 것이다. 복지를 지향하는 선진국의 경우는 국민의 세금에서 상당 부분을 다시 사회 복지의 형식으로 되돌려 준다. 사회 복지는 교육·의료·주택·연금 등은 물론이고, 공해 추방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실업의 걱정을 덜어주고, 노후의 생활도 보장해준다.
따라서 국민의 관심이나 정책가들의 성의는 예산의 규모에 못지 않게 그 복지 정책에 더 쏠려 있다. 「훌륭한 예산」이란 「훌륭한 고지」를 반영하고 있는 예산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정이 다르다. 안보와 개발이 우선 순위로 꼽히고 있다. 우리에게 돌아오는 몫으로 치면 적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생활 안정이다. 예산이 불어날 때마다 물가에 대한 불안이 뒤따르고, 그만큼 생활이 쪼들린다면 나라 살림이 커질수록 회의도 늘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예산을 집행하는 공무원들은 언제나 국민의 그런 회의를 부담으로 느끼고 있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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