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2087)-바둑에 살다(5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우리나라에 단위제도가 정식으로 생긴 것이 1950년이니 27년이 되었고 또「프로」기사 인단 대회를 실시한 것은 1955년이니 22년이 흘렀다. 일본에 비한다면 실로 연사한 역사라고 하겠다. 그러나 진짜로「프로」기사를 지향한 10대소년이 출현하기 시작한 것은 58년 가을 김인군(15세)이 등장함으로써 본격화했다고 하겠으니 근20년밖에 안된다.
물론 그전에 입단한 사람중에는 제2기 입단시합을 통과한 조양연군과 같은 소년기사도 없지 않았지만 대부분 40대이상의 노장들이 입단했으니 본격적인「프로」라고는 보기 어렵고「세미·프로」라고 함이 타당할 듯하다. 더우기 제1회때는 김태현씨(현3단)만이 혼자 출전 신청자였던 관계로 부전승으로 입단한 희귀한 기록이 있을 정도다. 김3단 외의 사람들이 불참한 것은 그전까지만 해도 이일선(현3단)·장국원 (은퇴)씨등을 추천으로 입단 시켰는데,당시 이분들과 호적수로 인정되는 분이 제법 있었음에도 왜 이분들을 추천 안했는가 하는 반발 때문이었던 듯하다.
이런 실력이 있다고 인정되는분들 중에 김현석이란 분이 있었다. 김씨는 보석이란 이름과 같이 바둑을 즐겼고 또한 잘 두었을 뿐만아니라 그 사람됨이 멋이 있어 마치 영국신사 같은 분이었다. 북한에서 교직원을 하다가 사변때 처자식을 남겨둔채 단신서울로 월남해 왔다고 한다.
서울남산국민학교 정문옆에 아담한 기원을 차려 번뇌의 세상사를 잊으려는듯 매일 바둑으로 소일했으니, 이 기원에 출입하는 고객들의 입을 통해 그분의 고명은 차차 서울장안에 퍼
지게 되었다. 『그 현석이란 사람은 정말 스님 이상으로 고결한 분이야. 더우기 바둑도 깨끗하게잘 두거든』 『아니 그뿐만 아니라 실력이 현재 「아마추어」간에는 제1인자일 거야. 』 이런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던 중 생홀아비 신세로 그대로 지낼 수가 없어 주위 사람들의 주선으로 결혼을 하게되었고 소생까지 얻어 안정하게 되었다. 57년에 제5기 입단대회가 있었는데 이때 한국기원의 총무직을 맡아본 윤숙씨와 같이 입단을 하게 되었다. 기왕 전문기사로 나선바에야 만사를 잊고 기계에 헌신하려는 생각이었음인지 혹은 실력향상을 꾀하려는 생각이었음인지 필자가 운영하는 송원기원 총무직으로 취직을 자청 해왔다.
나는 올바른 분을 만났다고 반겨 맞게되었다. 지난 8윌20일이었다 .이제는 당당한 전문기사일뿐만 아니라 교직원으로 단련된 깐깐한 저력이 기원의 일쯤이야 무엇을 맡겨도 척척 해치우는 솜씨었으니 기쁘기만 했다. 그러나 현석씨에게 흡족한 대우를 못해드리는 것이 안타깝게 생각되었다.
그러던 차에 한국기원 총무자리에 공석이 생켰다. 그래서 필자의 개인기원에서 일하는 것보다 총 본산격인 한국기원의 총무로 앉는 것이 여러가지 면으로 유망하고 보람있지 않겠느냐고 권하게 되었다. 본시 말이 적은 현석씨는 자의반타의반으로 이해 11월18일에 한국기원의 총무직 (당시는 총무가 기원 살림을 도맡아 했었다) 을 맡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착실하게 일하여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기원관계의 어느분의 전화를 받게되었다. 그 내용은 『혹시 김총무를 보지 못했습니까』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하루가 지나고 한달이 지나고 또1년이 지나 오늘까지 19년이 지나도록 현석씨는 종무소식이 되어버렀다. 어떻게 된 셈인지 완전히 증발해버린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세상사를 잊고 입산했는지도 모른다』고 했고, 또『어디 먼 곳으로 가버렸는지도 모른다』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가족들을 돌볼 능력도 없고 나이는 점점 먹어 쇠해가니 날이 갈수록 앞날이 걱정되어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조용히 사라졌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정말 구구한 추측이었다.
어쨌거나 현석씨는 한국기원에 이렇다 할 편지조각 한장 안남기고, 그렇다고 한국기원의 돈을축낸 것도 아니고 홀연히 사라진 것이다.
자고로 신선은 죽은 날도 간곳도 사람들이 모른다고 했거니와 현석씨야말로 죽은 날도 간 곳도 알 수 없으니 정말 신선이된 것일까. 신선이 되어 바둑삼매에 빠져 있는 것일까 .허황하고 덧없는 생각을 해본다.
혹은 어쩌면 늦게 입단한 부끄러움을 자결로써 처리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