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사법공조 용의표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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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미국이 우리 나라에 대해 사법공조용의를 통보해온 것은 사법공조협정이 없는 현실에 비추어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다.
이미 한미간에는 미국은행의 특정예금 기록에 대한 서울 형사지법의 압수수색 영상이 미국법원에 의해 집행 결정된 적이 있었다.
그 선례가 특정한 사건에 대한 구체적 사법공조였던 데에 비해 이번의 조치는 일반적인 것이라는데 질적 차이가 있다.
원래 넓은 의미에서 국제사법공조라고 하면 거기에는 좁은 의미의 사법공조 외에 범죄인 인도까지가 포괄된다.
그러나 미국이 제의한 대한사법공조는 좁은 의미의 사법공조로서, 소환장이나 영장 등 사법서류의 송달과 필요한 증거를 확보해 주는데 그치고 있다.
현행 국제법상의 일반적 규칙으로서는 마약의 취재·단속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국가에 사법공조의무가 당연히 과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개별국가간의 협정이나, 지난 54년과 65년에 체결된 「헤이그」민·상사사법서류해외 송달에 관한 국제협약에 가입한 경우에만 공조의무를 질뿐이다.
현재까지 우리 나라는 「헤이그」협약에도 가입하지 않았고, 다른 나라와 개별협정도 체결하지 않고 있다.
이렇게 법적 의무가 없는 경우에도 편의·관례 또는 국제 예양상 사법공조를 해줄 수는 있는데, 이번 미국의 조치는 바로 그 좋은 예다.
국제적 교류와 교역이 빈번한 현대사회에서는 국제적으로 사법공조의 필요성이 날로 증대되어 가는 추세다.
우리 나라만 하더라도 해외에 외화를 도피하거나 범법을 저지르고 해외로 달아나는 일이 점점 흔해지고 있다. 또 외국에 사는 외국인의 불법행위로 우리 국민이 보는 피해도 늘어나는 형편이다.
이러한 문제를 타결하기 위해서도 불가불 국제간의 사법공조에 대해 보다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번 미국의 조치는 긍정적으로 평가될 만하다. 현재 한미간에는 박동선 사건에 따른 사법공조문제가 걸려있어 자칫 곡해의 여지가 없지도 않겠으나, 미국 측이 통보한 공조내용으로 미루어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편이 합당할 듯 하다.
박동선 사건에 관해서는 이미 그 이상의 협조용의까지 표명된 만큼 이번의 미국조치는 순전히 사법공조의 확대란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
다만 이렇게 법적 의무로서가 아닌 단순한 협조단계의 사법공조만으로는 시대적 수요에 부응하기가 어렵다는 점도 간과되어선 곤란하다.
꼭 지금이 그 적기라고 단정하긴 어려우나, 우리도 이제는 외국과 단계적으로 사법공조협정을 체결해 나갈 때가 되었다고 본다. 우선 급한 대로 우리 국민이 많이 살고, 또 교류가 빈번한 미국·일본에서부터 그것이 시작되었으면 한다.
외국과의 사법공조의 폭을 넓혀가기 위해선 무엇보다 우리의 민·형사법제도가 국제적으로 신인을 받아야만 한다. 또 상호적으로 외국에 대해 사법공조를 제공할 수 있도록 국내법의 정비도 따라야 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국내법은 민사사건에 관한 외국의 확정판결을 집행하는 절차만이 민사소송법 2백3조, 4백76조,4백77조에 간단히 규정되어있을 뿐이다.
모처럼 이뤄진 한미간의 사법공조를 외국과의 그러한 협조의 폭을 넓히고 제도화하는 기회로 삼아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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